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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장에 겨울비는 내리고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 중학교를 졸업하는 신비의 소녀에게 

너의 중학교 졸업식이 열린 13일, 전국에 걸쳐 2월의 폭우가 쏟아졌다. 2월의 폭우는 난감하였다. 그 난감함으로 너의 중학교 졸업식은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기록적인 올 겨울가뭄도 덕분에 한풀 수굿해졌다. 고마운 일이다. 2월의 비도, 겨울 청보리 싹처럼 잘 자라고 있는 너도. 비좁은 졸업식장 앞을 우산의 물결이 한가득 부딪치고 쓸렸다. 아빠는 그 북새통 한복판에서, 십수 년 전 네가 태어나던 때를 떠올렸다. 2월의 폭우는, 묵음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신문사 수습기자였다.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가지 못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조막만한 네 쭈글탱이 얼굴을 보고, 비로소 아빠라는 존재감으로 명치끝이 뻐근한 걸 느꼈다. 그 비장함 위로, 꿀럭꿀럭 넘치는 빗물처럼 졸음이 덮쳐왔다. 까무룩 잠에 빠져들면서도, 이 사특하고 속악한 세상에 아무 선택권도 주지 않고 너를 내보낸 게 죄스러웠다. 짧고 깊고 두텁게 잤다. 꿈 한자락 들어설 자리 없는 먹먹한 잠이었다.

아빠가 죄의식과 불안감을 달래려고 겨우 가져다 댄 건 역사발전에 대한 낙관이었다. 네 인생은 혁명은 아니어도, 적어도 역사발전의 점증하는 계단을 또박또박 걸어 오르는 일이 될 거라고 쉽게 믿어버렸다. 그 믿음에 작은 각오 하나를 보탰다. 네 인생이 그러할 수 있도록 이 아빠도 열심히 아빠의 인생을 살겠다고. 아빠의 낙관이 구체적인 상으로 맺힌 건 교육이었다. 너는 입시지옥에 시달리지 않는 성장기를 보내게 될 거였다. 잘 될 것 같았다, 그땐.

역사는 더디지만 조금씩 절차적 민주주의를 향해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내겐, 그리고 네겐 짧게는 7년(초등학교 입학), 길게는 십수 년(중고등학교 재학)의 거치기간이 남아 있었다. 그 사이 한국사회는 형질전환을 이룰 것이었다. 아빠의 낙관은 한껏 낙관적으로만 보였다. 아빠는 네가 그때까지 ‘별을 당기다’라는 네 이름(奎援)처럼, 처음 쭈글탱이 얼굴로 까맣게 날 바라보던 네 눈부처처럼 그저 살아주기만을 대책 없이 바랐다.

7년의 거치기간은 짧았다. 아빠는 그 사이 아빠 생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보냈고, 너는 물만 주면 자라는 콩나물인 줄 알았다. 가끔 한 번씩 들여다 본 너는 그때마다 쑥쑥 자라 있었다. 아빠가 기억하는 네 초등학생 시절 학교 안의 모습은 운동회 때 또래 속에서 매스게임을 하는 두어 번의 풍경이 전부였다. 너는 무리 안에서 유난히 빛나 보였다. 너는 보기에 청정했다. 그것이 핏줄의 이끌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일요일, 아빠 회사 선배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던 때를 너도 잊지 못할 테지. 큰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고, 형수는 자랑인지 아닌지 모호한 말투로 몇 번이고 불판 고기를 뒤집으며 말을 이어갔다. 마침내 아빠가 그 집 큰아이에게 말했다. “넌 참 좋겠다. 우리 애는 공부 디게 못하는데.” 조용히 상추쌈을 싸던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다. 그러고도 한참 수다를 떨다 네가 돌아오지 않은 걸 알아챘다. 음식점 밖으로 나가보니 네가 한쪽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너도 그날 아빠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겠지만, 아빠는 자기가 친 공에 자기 정강이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빠는 네가 참으로 신비한 존재여서 세상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중과부적의 십자가를 네게 멋대로 지우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네 인생 앞에서 아빠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교육’이었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그 ‘가르치고 훈육하는’ 집단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굴레를 아빠 자신도 모르게 직감한 탓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단했다. 정강이가 많이 쑤셨다.

아빠는 여전히 널 가끔 한 번씩 들여다볼 뿐이었지만, 너는 너대로 물만 주면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너의 중학교 입학식 날 아빠 노릇 한 번 제대로 하겠다며 학교를 찾아갔으나, 네가 몇 반인지 몰라 교무실부터 들러야 했다. 네 이름을 검색하는 선생님의 컴퓨터에 뜬 네 입학 등수가 눈에 들어왔다. ‘공부 디게 못한다던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었군.’ 쾌재를 부를 수 없는 그 난감함이란.

하지만 넌 여전히 신비의 소녀였다. 아빠는 네 성적을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는데, 중학생이 된 너는 혼자 부산을 떨었다. 가끔 네가 쭈뼛거리며 시험성적을 얘기할 때마다 아빠는 행복했다. 친구들을 젖히고 앞으로 앞으로 치고나가는 것에 흡족해하는 핏줄의 속물근성 탓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네가 성적이 떨어져 인상을 찌푸릴 때도 아빠는 하냥 행복했다. 넌 아빠의 얼치기 교육관(반면교사)과 상관없이 세상과 밀고 당기며 제 인생을 잘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너는 벌써 아빠로부터 많이 분리되었다. 아빠는 네가 이 사특하고 속악한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네 나름의 방식으로 대면하는 걸 보며, 아무 상처 없는 인생이 되기를 바랐던 아빠의 과욕을 슬며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빠는 네 상처로 인한 아빠의 상처를 아파하고 치유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네가 중 3이 되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을 때도, 일주일 뒤 다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생각을 바꿨을 때도, 아빠는 그렇게, 너와 한걸음 떨어져 불안감을 다스렸다.

아빠가 널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을 처음 털어놓으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넌 3월 첫 달만 빼고 학년 내내 한 아이와 짝꿍을 했었다. 그 짝꿍은 지적장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어울릴 줄 아는 아이가 너밖에 없어서 짝꿍을 바꾸지 못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다. 콧날이 시큰했다. 네가 아무리 전쟁 같은 야만의 나날을 살아가더라도, 그때의 모습으로부터 네 삶이 그리 멀리 나가지 않기를, 아빠는 너로부터 덜 분리된 핏줄의 끌림으로 겨우 소망한다.

2월의 폭우가 그치자 세상의 소음이 들려왔다. 네 까만 눈동자에 처음 아빠 모습이 어른거렸던 눈부처도 ‘팍’ 하며 사라지고, 까만 잠자리 뿔테 안경을 쓴 네가 두리번거리며 가족을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신비의 소녀야. 다시 닥쳐온 너의 험난한 3년을 위해, 오늘 점심은 돼지갈비다.

* 이 글은 네가 성인여성이 되었을 때 읽어볼 수 있도록, 공표 사실을 지금 알리지 않는다. 아빠 가슴 속 타임캡슐에 보관하련다.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