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발표글

삶의 총체성에 묻는다. 그대는 다운시프터인가?

 - MBC 심야 스페셜 <속도의 시대, 느리게 살기>를 보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초등학생 때 ‘우리나라의 70%는 산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다. 내가 그 지식을 머릿속에 새길 무렵, 대한민국의 대표 유행가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로 시작하는 남진의 ‘임과 함께’였다. 산악 지형의 국가에서 태어나 저 푸른 초원을 동경하며, 나는 공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를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이 느낀 공복감은 초원을 향한 동경이 아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의 옛 버전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다. 둘은, 그 뿌리가 ‘번듯한 내집’이라는 데서 하나다. 나 또한 초원보다는 그저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작은 공부방 하나를 갈망하며 단칸방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많은 이들이 도시생활에 넌더리를 낸다지만, 도시를 버리고 떠나는 인구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유입하는 인구를 견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조소를 자아낼 일이다. 그나마 도시를 떠나는 이들을 보면 더러 ‘귀농’하고, 대개는 ‘귀전원’한다. 저 푸른 초원을 향한 집단적 동경은 친환경주택이 아닌 전원주택으로 ‘실현’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타워팰리스와 경기도 이천의 전원주택단지는 ‘공간’의 차이를 무색하게 한다. 휘발유를 태워가며 서울로 출근하고, 퇴근길에 대형마트에 들러 트렁크를 가득 채울 만큼의 먹거리(채소는 반드시 유기농이다)를 화폐를 주고 사들여온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름하여 ‘웰빙’ 세상이다.

   “삶의 변속기어를 낮추자.” ‘다운 시프팅’은 속도, 즉 ‘시간’에 관한 삶의 태도다. 심야 스페셜 <속도의 시대, 느리게 살기>에는 도심 한가운데서 노점을 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 여성의 본래 직업은 전문직인 디자이너. 공간과 직업으로만 보면 전형적인 현대 도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다운시프터’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 여성 말고도 많은 다운시프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대개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 유독 그 여성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다운시프팅이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고래등 같은) 집을 꿈꾸는 것과 무관하다는, 아니 오히려 대치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시간은 곧 속도로 환산된다. 속도는 오늘날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기제다. 세계 증시나 다국적 기업을 보라. 그곳에서는 자연의 시곗바늘이 멈춘 지 오래다. 영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제이 그리피스는 <시계 밖의 시간>에서 “속도가 늘 그러하고 파시즘이 늘 그러하듯이, 다국적 기업은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반대를 허용하지 않으며, 시장의 한 선두주자가 다른 경쟁자들을 몰락시켜 궁극적으로 전지구적 지배를 추구하고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환경이나 사람들을 파괴하고 획일화를 강요하는 전체주의”라고 일갈한다. 그에게 속도 이데올로기와 파시즘, 다국적 기업은 하나다.

   다운시프팅이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다운시프터들이 자본주의적 시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골살이가 전원생활의 양식과 차별되는 건 분명하다 해도, 그들 가운데 다수는 도시의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졸음을 쫓으며 꼭두새벽 집을 나서야 한다. 누군가는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려고 속도를 더 낼지 모른다. 그 순간 다운시프터 발밑의 가속 페달은 다운시프팅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일부 ‘운좋은’ 이들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여유 속의 검박을 ‘누리고’ 살 뿐이다.

   그래서 다운시프팅의 반자본주의는 전면적일 수 없다. 정확히 짚자면 다운시프팅은 자본주의의 ‘반정립’이 아닌, 자본주의와의 부분적인 ‘관계 조정’이다. 다운시프터들의 상당수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웬만큼 성공을 거두었거나 거둔 적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런 단서적 징후는 읽힌다. 다운시프팅은 자본주의 이후 삶의 양태가 아닌 자본주의적 삶의 특수한 양태인 셈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를 읊는 도시인들 가운데는 다운시프터가 되려야 될 형편이 못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을 터이다.

   도심 한가운데서 노점을 하는 여성 디자이너가 눈길을 끄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성찰을 ‘공간’이 아닌 ‘시간’에서 찾고 있다. 물론 도시는 근대 자본주의가 낳은 공간적 산물이다. 그의 삶은 ‘피안의 세트’가 아닌 가장 자본주의적인 현실세계에서 구성된다. 그의 소일거리가 디지털 카메라로 주변의 소소하면서도 퇴락해 보이는 사물을 기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의 부조리와 대면해 존재의 소외를 가시화하고 극복하려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에서 속도는 시간과 거리의 함수관계를 넘어선다. 삶이 의탁하는 공간 구조와 생산양식을 끌고 질주하는 것이 이 체제 아래서의 속도다.

                                                                                                                                             (2006년 9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