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발표글

‘오시오 아파트’를 꿈꾸다!

- MBC 베스트극장 ‘오시오 떡볶이’를 보고

 

  어느 대기업 아파트 광고의 메인 카피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이다. 여기서 가족은 ‘정상 가족’에 한정된다. 아파트가 1인 가족의 생활양식을 대변하는 주거 형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파트 광고의 컨셉으로 ‘가족주의’가 동원되는 것은 확실히 한국적이다. ‘아파트 가족주의’는 어쩌면 가족주의가 가족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국적 현실과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관계 위에서 성장한 한국 자본주의는 정작 얼마나 많은 남편과 아버지를 가족들로부터 빼앗는 결과를 낳았던가.

  가족주의가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모로 명백하다. 우리는 헌법상 주권자로서 많은 기본권을 가족주의 국가체제 아래서 유린당해 왔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주권의 수탁자를 직접 선거로 뽑는 대신 국민의 아버지를 체육관에서 뽑는 걸 정당화했다. 사랑하는 남녀를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지대로 유배하고, 가족의 생계를 이끄는 여성 가장을 ‘호주제’를 들이밀어 아들의 피부양자로 비인격화한 것도 가족주의가 구축한 정상 가족의 제도였다.

  동성동본 금혼과 호주제가 최근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정상 가족의 성채는 여전히 굳건하다. 동성(同性) 부부 등 성적 소수자 가족의 제도화를 바라는 건 비제도 영역에서 가족주의가 오히려 훨씬 광범위하고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너무 순진한 기대일까? 남편에게 폭행당한 아내나 친척에게 성폭행당한 딸이 ‘집안 체면’ 탓에 오히려 죄인이 되고, 수없는 여아 살해가 서슴없이 자행되는 현실은 가족주의가 일상의 파시즘에 다름 아님을 웅변한다. 정상가족의 핏줄 폐쇄회로를 완성하고 우리가 얻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몇 해 전 서울 주변 새도시 주민들의 ‘러브호텔 반대 투쟁’은 ‘특수 숙박업’을 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뒤로도 ‘마이 스위트 홈’ 안에서 벌어지는 스위트한 일상은 정작 전쟁이나 다름없다. 아파트값 담합과 자식 대학 보내기 전쟁! 그들은 비제도화된 ‘러브’를 일삼는 화성인들을 러브호텔에 실어 우주 밖으로 날려버렸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 많은 러브호텔들이 망하지 않는 걸 보면 배우자들의 부정이 비가시화된 것에 겨우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그 정도로도 정상 가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은 될 테지만.

 그래서 <오시오 떡볶이>의 가족 구성원이 둘다 “병신”인 건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상 가족을 구성하는 요건에 있어서 신체의 정상성조차 획득하지 못한 이들에게 가족의 의미는 주인공 말마따나 “죽으면 거둬줄 사람” 정도인지 모른다. 그러나 ‘죽으면 거둬줄 사람’은 살아서는 서로에게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이의 다리가 되어주고 한쪽 팔이 없는 이의 팔이 되어주는 존재다. 그들 사이에 핏줄이 섞여 흐르든 말든, 그들은 가족의 가치를 잊고 사는 정상 가족들의 가슴을 눈물로 적신다. 가족주의에 짓눌린 자신의 불행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가족은 문화와 문명에 따라 수없이 다양한 제도와 양식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어떤 제도와 양식이든, 그것이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위계와 권력 관계로 작용하여서는 안 된다. 이미 한국사회는 하나의 잣대로 관계의 정상성을 재단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로 짜여 있다. 농촌에서는 총각 열에 셋이 피부색이 다른 여성과 결혼해 제3의 피부색을 가진 2세를 낳는다. ‘미완의 구성원들이 모여 하나의 완성을 이루는 단위’가 이제 가족의 유일한 정의여야 한다. 덧붙이자면,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서 아들이 아닌 게 아니”듯, 이제 아파트 광고도 달라져야 할 때다. ‘오시오 아파트’는 어떨까!

                                                                                                    (2006년 10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