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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비판이 피해자를 만났을 때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피해여성을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지난 6월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비판 시리즈’(<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첫번째 문턱은 책 제목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선생도 멘토도 없이 홀로 머리 싸매고 책장을 넘기다 도돌이표처럼 이런 의문과 마주치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성을 공격하는 내용도 아닌데, 왜 ‘비판’이란 제목이 붙었을까?

 

독일어 ‘Kritik’(크리티크)를 번역하면 ‘비판’이 맞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판’을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으로 풀이한다. 하지만 언중의 우리말 세계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만 충만하다. 지식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비판이라면 상대가 소매 걷고 덤빈다는 듯이 반응하기 일쑤다. 칸트의 ‘비판’을 내가 오해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김진영은 ‘비판’을 이렇게 정리한다. “흔히 오해되듯 어떤 사안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언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은 ‘올바름’, 더 정확히 말하면, 사안의 내용에 대한 객관적 정확함(에 대한 지향)이다. (…) 동시에 주관적인 언술이기도 하다. 이는 또 하나의 객관성, 정확히 말하면, 다루어지는 사실과 정보의 현재성, 즉 그 내용들이 오늘 여기의 현실과 어떤 관계를 지니며,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어내는 작업을 의미한다.”(<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비판은 지적 성실성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지난 사실을 당대성의 감각으로 끝없이 경신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자신의 실존이 타자한테 건너갈 수 있도록 밀고 나가라는 요구인 듯도 하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비판의 토대는 비판하는 주체의 태도라는 사실이다. 태도는 엄정하고 단호해야 한다. 이는 타자를 향한 태도이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요청이다. 비판이 익명성의 어둠 속에서 발화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판의 인식론에 관한 탁월한 전범으로 발터 베냐민의 ‘알레고리’를 꼽을 만하다. 베냐민에게 알레고리란 파편처럼 흩어진 단서들을 모아 ‘징후적인 맥락’으로 재구성한 서사다. 요는 문드러진 비문을 복원하고 축자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비문과 문드러진 비문 사이에서 역사적인 메시지를 간취하는 것이다. 베냐민의 관점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비판의 불모지다. 맥락성의 대지가 너무 척박한 탓이다. 맥락성의 적은 다름 아닌 이분법이다.

 

가슴 뜨거운 이분법에는 정작 가슴이 없다. 가슴은 이분법을 해소하고 승화하는 알레고리적 신체다. 비판은 머리가 가슴속으로 삼투한 산물이다. 진실한 비판은 비판하는 주체의 삼엄한 가슴까지 아리게 하거나 벅차게 울린다. 그 박동이 비판받는 타자의 가슴을 거쳐 머리로 전달될 때, 비판의 상호성과 연쇄성이 열린다. 비판은 공감의 공론장을 가동하는 엔진이다.

 

비판의 효과가 ‘공감’일 수는 있지만 ‘감응’일 수 없는 사정도 그 안에 있다. 공감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의지가 요구되지만, 감응은 비의지적이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공감의 이런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인지성과 감수성이, 머리와 가슴이 서로 열리고 개입하는 긴장된 균형 상태. 그건 저절로 이뤄지지 않고 지난한 훈련 과정을 거쳐 숙달해가는 것이리라.

 

공감 안에는 얼마만큼의 불편함이 들어 있다. 비판이 공감으로 나아가려면 불편함을 서로 감수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비판의 상대가 그 불편함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 비판의 상호성과 연쇄성의 엔진은 멈춰 선다. 비판 주체의 윤리가 실종된 사회, 공격적 독백과 가해적 댓글만 창궐하는 사회는 비판의 수용성이 취약한 사회의 이면은 아닐까.

 

불편한 질문을 던져본다. 피해자와 관련한 사안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가령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 대리인의 어느 일면에 던지는 사유적인 형식의 이의 제기는 어떤가. 고문 피해자에겐 고문에 관한 은유도 고통이 될 수 있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사려(에세이 ‘터널 앞에서’)를 온전히 수용하더라도, 이런 의문은 남는다. 가해자 중심의 저열한 공격에 맞대응하는 것이 주전장이 될 때, 우리 미래는 달라질 수 있을까. 저들을 낙후시키기 위해 지금 여기에 요청되는 것은 피해자 쪽이 참여하는 진정한 비판의 공론장 건설이 아닐까.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7690.html

 

[아침 햇발] 비판이 피해자를 만났을 때 / 안영춘

안영춘 ㅣ 논설위원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치밀하기 이를 데 없는 ‘비판 시리즈’(<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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