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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극우 저널리즘과 광신적 테러리스트의 만남

모든 사안에서 언제나 논리가 명쾌했던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도 이번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평소 노르웨이 사회가 외부 약탈을 통해 내부의 사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며 비판적 긴장을 유지해오던 그였지만, 이번 사건만큼은 발생 개연성조차 내다보지 못한 듯했다. 그는 끝내 말을 아꼈다.

물론 브레이비크 테러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유럽에서 극우주의적 징후는 뚜렷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올 1월호는 유럽 각국의 극우파들이 최근 어떻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지난 2년간 유럽 극우 정당들은 선거에서 득표율 10%를 넘어섰고, 몇몇 국가에서는 15%를 돌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광신적이기는커녕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제도권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이번 테러는 인명 피해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공황적 상태를 야기했다. 그것은 체제에 관한 신화의 붕괴를 뜻한다. 전 세계에서 평등주의가 제도적으로 가장 잘 운영되는 나라에서 약자에 대한 증오 살인이 발생했다. 1995년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나 2001년 9·11 테러가 준 충격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국가는 각각 ‘안전’에 관한 나름의 신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테러는 그 신화를 타격했다.

사실 정치학과 정신병리학은 조우하기가 쉽지 않다. 유럽에서 극우주의가 팽창하는 것과 기독교 극우 민족주의 테러의 관계는 논리적(인과)으로 입증하기보다는 시각적(풍경)으로 인지하는 게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조차 매우 치밀하고 긴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그럴 시간 여유가 없다. ‘위기’는 하루빨리 담론시장에서 유통되고 소비된 다음 돈으로 회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학과 정신병리학을 될수록 더 멀리 떼어놓거나, 양쪽을 모두 극도로 단순화시켜 오히려 인과성을 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브레이비크를 ‘살인마’라고 호명하면 그는 개인화되고, 체제의 연관성은 희붐해진다. 아니면, 체제 연관성을 유럽의 다문화정책 실패에서 찾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때부터 문제는 다문화정책이 된다. 정확히 브레이비크의 시각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적 약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그 지점에서 약자들 내부의 위계와 적대가 극단적으로 발현하고 있다는 비판은 담론의 장에서 퇴출된다.

더하면 더했지, 한국 언론이라고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상당부분 외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국 언론의 순발력은 놀라울 정도다. ‘93명 살인마 법정 최고형 받아도 징역 21년’(<조선일보>·<동아일보> 7월 25일치)이라며 사형제가 폐지된 노르웨이의 형법을 문제 삼는다. 브레이비크가 그토록 칭송했던 가부장의 나라 대한민국의 대표신문들은 그렇게 그를 저버렸다.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다. 극우 상업주의의 본성은 기회주의다.

※ <한국방송대학보> 1638호(2011년 8월 1일)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