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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초현실주의적 8·15

2011년 8월 15일.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가한 야당 국회의원의 머리채가 지나가던 여성의 손아귀에 붙들려 풍물패 상모 돌듯 돌아간다. 여성은 국회의원에게 “빨갱이”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현직 서울시장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다섯 살배기 어린이 같은 해맑은 표정으로 ‘무상급식 반대’ 1인 시위를 벌인다. “복지 포퓰리즘이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면서.

언론에 재현되는 8·15의 풍경이 해가 갈수록 기이해지고 있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양손에 나눠들고 통성기도를 하는 부조리극은 이미 일일 드라마보다 자연스러워졌지만, 이제는 아예 초현실주의극 단계로 넘어간 듯하다. ‘민족해방’과는 도통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민족해방이라는 집단기억을 매개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66년 전 한민족이 맞았던 해방과 이후 근현대사의 진실을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부한 언설이지만, 1945년 이후 한국사는 친일부역 역사의 ‘청산’이 아니라 ‘계승’이자 ‘갈아타기’로 시작돼 유구히 이어져 왔다. 그 화신이 바로 만주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변신해 18년을 철권통치한 박정희였다. 그가 이순신 성웅화에 앞장선 것은 일종의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 만들기였으며, 친미반공은 한국전쟁의 기억과 함께 그 알리바이를 조건반사적으로 연상시키는 기제, 파블로프 박사의 종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전할수록 8·15는 아슬아슬한 퍼포먼스가 되어갔다. 허술한 알리바이의 이음매 사이로 역사적 진실이 삐죽삐죽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그 스릴을 감당하지 못하고, 8·15의 이름을 아예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헌법 전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1948년 이전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것이었다. <KBS>는 지금 ‘백선엽 다큐’에 이어 다시 ‘이승만 다큐’ 강행을 시도하며 아등바등 그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8·15에 ‘복지’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맥락 없는 외삽이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던 제헌헌법 부칙에는 중요 산업의 국유화, 무상 교육, 무상 치료 등을 골자로 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 강령의 반밖에 안 되는 반값 등록금을 빨갱이 정책으로 매도하고,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교육시간 동안 끼니를 제공하는 것을 포퓰리즘이라고 선동한다면, 8·15는 건국을 기억하는 날조차 아니라는 자기고백일 뿐이다.

어쩌면 8·15는 누구의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날인가를 다시 묻는 날인지도 모른다. 내년 8·15에는 그런 날선 질문을 언론에서 보고 싶다.

※ <한국방송대학보> 1640호(2011년 8월 22일)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