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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아이티는 상처입은 야수인가?

주류언론의 현지 르포, 약자를 타자화하는 지배윤리의 시선

“선량한 시민과 폭도는 구별되지 않았다. 아이티 대지진 엿새째. 외국 구호단체를 반기는 것은 굶주린 손길이 아니라 이성을 잃은 약탈자들의 정글칼이었다.”


지난 1월 19일 <조선일보> 1면 기사의 첫 단락이다. 기사 위에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무너진 상점 앞에서 시민들이 물품을 차지하려고 서로 드잡이하는 사진이 실렸다. 사진은 군중 가운데 칼을 들고 상대를 위협하는 남성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기사의 제목은 ‘그들의 눈빛이 변해간다’였다. 이 인상적인 문장과 사진, 제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약대 구실을 하며 삼위일체의 매우 강력한 이미지를 구성한다. ‘인면수심’.

아이티 현지에서 쓴 르포기사지만, 이 신문의 시선은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고 있다. 기자가 서있는 공간과 그의 의식의 입각지점은 심각하게 어긋난다. 그에게는 실존의 벼랑 끝에 몰린 아이티인들의 참극이 안정된 사회의 도덕규범보다 후순위에 놓인다. 굶주린 손길은 외국 구호단체 앞에서 질서정연한 환영의 손짓이어야 옳다. 아이티인들은 그렇지 못한 존재이기에, 이번 자연재해는 그들의 야만성에 대한 초자연적 징치일 수 있다는 개연성이 열린다.

이것이 과장된 해석만은 아니라는 건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근본주의자 팻 로버트슨 목사가 내뱉은 말을 통해 입증된다. “독립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아이티에 대한 신의 저주!”(<한겨레> 1월 27일자 ‘곽병찬 칼럼’ 재인용). 부두교가 서구제국에 맞선 아이티 흑인노예 해방전쟁의 구심점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자. 부두교에서 권선징악의 상징요소인 좀비가 할리우드에서 악의 화신으로 둔갑하는 사정은 숫제 우연일까.

아이티가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뒤 미국의 봉쇄정책과 영토 침략, 쿠데타 배후조종 등 잇단 폭압 때문에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조선일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령 아이티인들 일부에게 질서정연한 지배규범이 내면화되지 못했다고 해도, 그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지 않다. 이 조그마한 섬나라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그 정글을 지배해왔던 이들에게 마땅히 훨씬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야 한다.

<조선일보>나 로버트슨 목사의 시선은 정작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고 있다. 정상성의 내부에서 바라볼 때, 외부로 배제된 타자는 인면수심이자 악마에게 영혼을 판 노예로 재현된다. 그들이 내민 구호의 손길 뒤에 정글칼이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에게 아이티인들에 대한 연대감이 없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1면부터 대서특필하던 아이티 참사가 <PD수첩> 1심 판결 하나 때문에 지면에서 종적을 감추다시피한 사태를 이해할 길이 없다.

※ <한국방송대학보> 제1571호(2010-02-01)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