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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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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어느 대선 이야기 20대 대선 결과가 나온 지도 2주가 지났다. 여느 때처럼 승패의 결과를 토대로 과정을 복기하는 백가쟁명이 만개했다. 세대와 젠더는 누구나 언급한다. 진영과 이념도 못지않다. 거대 양당의 패권주의와 이를 재생산하는 87년 체제는 진보 논객이면 빠뜨리는 법이 없다. 미-중 갈등이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국제 정세의 영향이 언급되는가 하면, ‘탈진실 시대’라는 글로벌한 현상이 후경에 배치되기도 한다. ‘거봐라’ 식의 사후예언적 냉소와 ‘민심은 천심’이라는 게으른 인식론, ‘졌지만 잘 싸웠다’는 정신승리법도 적지 않지만,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하는 탁월한 분석이 넘쳐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쓸모’는 별개의 문제다. 대통령실 이전을 둘러싼 사상 유례없는 ‘당선자 폭주’ 사태가 공론장을 블랙홀..
탈진실 시대의 ‘무지’와 ‘무시’ ‘무지’와 ‘무시’는 획 하나만 다르지만, 뜻이 가깝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남’(타자)과 ‘님’의 관계처럼, 우연히 표기만 닮은 거라 여겨진다. 영어 ‘ignorance’(무지)와 ‘ignoring’(무시)을 보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기만 닮은 게 아니다. 동사 ‘ignore’는 ‘무지하다’와 ‘무시하다’의 뜻을 모두 갖고 있다. ‘모르는 것’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뿌리가 닿아 있다는 듯.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은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철학자 낸시 튜어나는 무지를 4개 영역으로 나눴다. ①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②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③ (특권을 가진) 타인의 바람 때문에 모르는 것, ④ 의도적인 무지(레테나 샬레츨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