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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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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입에 올렸고,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할 독보적 가치로 추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인 ‘하이쿠’처럼 언어 밖으로 탈주하려는 텅 빈 기표 같기도 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에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 왜 자유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도약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혁신과 필연적 관계인지 따위에는 지극히 말을 삼갔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도 채워 넣기 어려운 그 광막한 행간은 결국 그가 5번 호명한 ‘여러분’ 몫으로 할당됐다. 하지만 각자 흩어져 따로 노는 저 파편적 개념들 ..
자유주의 독립신문의 그림자 은 우리 근대 신문의 효시이자 상징이다. 1957년 제정된 ‘신문의 날’은 창간일(1896년 4월7일)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 근대 신문에서 떠오르는 ‘자유’ ‘민주’ ‘인권’ 같은 신화적 이미지도 당연하다는 듯이 에 돌아간다. 그러나 이 신문의 실제 보도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에는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보도와 외세 의존적이면서 민중을 불신하는 보도가 모순적으로 공존했다. 가령 군주제 아래에서도 당당히 참정권을 주창했으나,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백성은 민권이 무엇인지 모르니 함부로 그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오늘날 국회의원 격인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발행 주체인 독립협회가 뽑아야 한다(헌의 6조)며 왕권에 도전하면서도, 정작 백성의 저항..
언론의 자유에 침을 뱉어라 한 달 반 만에 새로 올린 글, 그마저 블로그를 위한 글은 아니었습니다. 2월호에 쓴 글입니다. 먼지를 툭툭 털며, 포스팅합니다. (1995)에서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의 마지막 대사 “프리덤”은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영국 왕의 압제에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는 이의 미학적 비장함은 단연 압권이다. 그러나 맥락은 스타카토처럼 튄다. 13세기,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을 이끌던 이의 마지막 발화가 과연 ‘자유’였을까.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투사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순간 했던 말은 ‘자유’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였을 것이다. 또, 백인들의 잔인한 도륙 앞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 ‘자유’를 외쳤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설령 월레스가 ‘자유’라고 외쳤다 해도, 그것은 ‘프리덤’(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