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민주주의

(2)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입에 올렸고,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할 독보적 가치로 추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인 ‘하이쿠’처럼 언어 밖으로 탈주하려는 텅 빈 기표 같기도 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에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 왜 자유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도약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혁신과 필연적 관계인지 따위에는 지극히 말을 삼갔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도 채워 넣기 어려운 그 광막한 행간은 결국 그가 5번 호명한 ‘여러분’ 몫으로 할당됐다. 하지만 각자 흩어져 따로 노는 저 파편적 개념들 ..
언론의 자유에 침을 뱉어라 한 달 반 만에 새로 올린 글, 그마저 블로그를 위한 글은 아니었습니다. 2월호에 쓴 글입니다. 먼지를 툭툭 털며, 포스팅합니다. (1995)에서 윌리엄 월레스(멜 깁슨)의 마지막 대사 “프리덤”은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구성한다. 영국 왕의 압제에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는 이의 미학적 비장함은 단연 압권이다. 그러나 맥락은 스타카토처럼 튄다. 13세기,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을 이끌던 이의 마지막 발화가 과연 ‘자유’였을까. 이를테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투사가 비운의 죽음을 맞는 순간 했던 말은 ‘자유’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였을 것이다. 또, 백인들의 잔인한 도륙 앞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 ‘자유’를 외쳤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설령 월레스가 ‘자유’라고 외쳤다 해도, 그것은 ‘프리덤’(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