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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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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장삼이사의 극단적 선택은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 등 정형화된 선택지 중 하나에 기필코 배치된다. 물론, 모든 죽음을 낱낱이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자의 죽음 앞에 가로놓인 실존의 강을 건너가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타자의 죽음을 산 자의 감정으로만 처리하면서 그걸 애써 ‘애도’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실의에 빠진 돈키호테를 향해 산초는 “슬픔은 짐승이 아닌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슬픔이 지나치면 사람도 짐승이 돼버린다”며 나무란다. 진정한 애도에는 멜랑콜리(슬픔과 우울)를 넘어서려는..
전쟁 같은 일상, 어디라도 이태원이다 지난달 30일 아침, 버스를 갈아타려고 서울 연세대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여느 일요일 출근길이면 차 한대 볼 수 없던 연세로를 버스들이 태연히 오가고 있었다. 서대문구가 얼마 전에 ‘주말 차 없는 거리’를 폐지했고, 평일엔 버스만 지나갈 수 있는 ‘대중교통전용지구’마저 해제하려고 한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었다. 한적함이 좋아 500m를 부러 걸어서 지나곤 하던 거리가 차량과 경적 소리만 빼곡했던 오래전으로 되돌아가 있는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 이태원 참사에 개기일식처럼 검게 먹어버린 심장 한가운데로 저릿한 파동이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와 그보다 한없이 사소해 보이는 기초지방자치단체의 퇴행 사이에도 별자리처럼 이어지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그날 이태원로의 차량 통행을 막았더라면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