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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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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완용과 이별하는 법 이완용은 친러파였다. 1896년 아관파천의 핵심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고종 부자가 러시아 공사관 깊숙이 몸을 옹그리고 있는 동안 친러 내각의 외무대신에 올랐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친러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전 한때는 친미파였고, 그보다 앞서 수구파이거나 개화파일 때도 있었다. 물론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악랄한 친일파였고, 친일파로 산 시간이 가장 길었다. 그러나 ‘친일파’라는 단일 정체성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한 팔색조의 생이었다. 이완용의 변신 논리는 한마디로 ‘힘’이었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힘을 좇는 데서만은 경이로운 일관성을 보였다. 친일파로 변신한 것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였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가 애오라지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힘..
2015 재림한 ‘소요죄’가 말하는 것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 후작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에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글 안에는 모두 5차례 ‘소요’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경고는 조선 민중을 향한 것이고, 소요는 그들의 만세운동을 가리킨다.2015년 11월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체포됐다. 경찰은 ‘소요죄’ 혐의까지 얹어서 그를 검찰에 송치했고, 경찰청장 강신명은 다른 가담자 여럿도 체포해서 똑같은 혐의를 적용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 다음에는 희극으로.” 카를 마르크스가 1장에 남긴 저 유명한 명제(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다)를 거의 100년의 시차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