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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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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추억’은 다른 누군가의 ‘아픈 기억’ 언론의 ‘선택적 추억’ 감상하기 인간은 모든 것을 추억하지는 않는다. 추억은 무언가를 과거형으로 송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로 불러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욕망의 격발 장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격발 장치는 다분히 현재형이다. 영화 문법으로 말하자면, 추억은 현재가 과거를 불러낸 시퀀스다. 얼마 전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에 쓴 칼럼 제목은 ‘사찰의 추억’이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과 관련한 글이었다. ‘추억’이 낭만성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면 이 제목에서 추억의 주체는 곧 ‘사찰’의 주체다. 사찰을 당했거나 사찰을 목격한 이가 사찰을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에서 추억의 주체는 영화 속에서도 끝내..
‘노무현’ 그 이름에 동의하지 않았던 자들의 슬픔 [미디어스 데스크] 그의 생전에 그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몇 사람이 어울려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난 늦은 밤이었다. 노래는 내남없이 구슬펐다. 낮에 TV 생중계를 보거나 서울광장에 서서 한소끔 눈물을 몰래 훔친 것이, 일주일 내내 머리가 멍하게 아팠던 것이, 그 순간만큼은 쑥스럽거나, 이물스럽지 않았다. 그의 이념과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것과 그의 죽음에 연민하는 것은 모순돼 보이지 않았다.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나는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다. 노래를 마칠 무렵, 그의 죽음과 관련해 글을 몇 편 쓰고도 정작 그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안구 건조증이라도 걸린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