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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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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장삼이사의 극단적 선택은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 등 정형화된 선택지 중 하나에 기필코 배치된다. 물론, 모든 죽음을 낱낱이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자의 죽음 앞에 가로놓인 실존의 강을 건너가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타자의 죽음을 산 자의 감정으로만 처리하면서 그걸 애써 ‘애도’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실의에 빠진 돈키호테를 향해 산초는 “슬픔은 짐승이 아닌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슬픔이 지나치면 사람도 짐승이 돼버린다”며 나무란다. 진정한 애도에는 멜랑콜리(슬픔과 우울)를 넘어서려는..
애도는 무엇으로 애도인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대응을 묻는 기자에게 “××자식”이라고 한 것은 그저 욕설로만 들리지 않는다. 문제의 표현은 특정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이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표지를 붙인 데 연원을 두고 있다. 이 대표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질문자의 자격을 따졌고, 그 자리가 박 시장의 빈소였던 맥락까지 고려하면 ‘애도자로서의 자격’을 따졌던 셈이다. 그의 욕설을 순화해 재구성하면 “당신은 애도자로서 자격 미달입니다”쯤 되지 않을까. 빈소에서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논쟁적일 수 있다. ‘굳이 그 자리여야 했을까’라고 물으면 여러 논거로 찬반이 갈릴 것이다. 한국기자협회가 이 대표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을 낸 것은 ..
상복보다 더 시키먼 조중동K의 속내여 ※ 이 글은 제763호(2009.06.05)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대형 특별기획 표지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그동안 외부에 발표한 글에 대해서는 해당 매체 인터넷이 기사를 공개하고 나면 와 제 블로그에서 ‘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지만, 이번 글은 ‘발행’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6월4일 오후 에 톱기사로 걸려서, 같은 글 하나를 놓고 세 곳에서 ‘노출’하는 것이 민망해졌기 때문입니다. [표지이야기-분노의 기억] 족벌언론과 관제방송 KBS의 ’애도 저널리즘’…타살 공범관계 뒤덮으려 ‘탈정치’ 덧칠하다 당신은 슬프던가? 제호 아래, 5월의 폭우를 맨몸으로 맞고 선 봉하마을 추모객들의 먹물 같은 표정 사진은 당신 심장 안으로 삼투압되던가? 호외판 1면 가득 실린 망자의 얼굴 사진을 보며, 30m..
노무현을 기억하려는 자와 지우려는 자 [미디어스 데스크] 자살과 애도의 정치·사회학적 잡설 안영춘 편집장 jona01@mediaus.co.kr 고전주의 미학이라면 이럴 땐 비극적이되 장엄하고 숭고한 이미지라야 한다. 지금 한국의 대중매체들이 재현해내는 애도의 퍼포먼스가 꼭 그렇다. 톡톡 튀는 목소리로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여성 아나운서는 라디오 뉴스에서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신문 호외 편집도 더없이 무겁고 장중했다.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도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숙취로 절여진 내 전두엽을 치고 간 건 드라마 소품처럼 사소한 기억이었다. 경악하고 애달파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부조리해보였다. 내가 기억해낸 건 비교적 최근 누군가로부터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