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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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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과 양창수, ‘또 하나의 가족’ ‘상피’(相避)는 친인척 사이의 비리와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운영됐던 유서 깊은 제도다. 기원은 부모와 자식이 재상급 관직에 동시에 오를 수 없도록 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성문화는 고려 시대에 이뤄졌다.( ‘형법지’) 조선 시대 들어서는 적용 대상도 크게 확대됐다.() 일정한 촌수 안에 드는 친인척끼리는 같은 관아에서 관직을 맡지 못하게 했고, 과거 시험에서 감독관과 응시생의 관계로 마주치지 못하게 했다. 친인척이 당사자인 송사의 재판관도 맡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지방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관리는 그 지방에 파견하지 못하게 했다. 뜻은 좋으나, 연좌제 성격이 없지 않다. 오늘날은 혈연을 이유로 공직의 진출, 승진, 보직을 사전에 제한하는 제도는 없다. 가령, 201..
경향 칼럼 사태로 본 언론자유의 변증법 “과거 언론 자유를 위협한 세력은 정치권력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원천적이며 영구적 권력인 자본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언론인 김중배가 1991년 편집국장을 그만두며 내뱉었던 일성이다. 언론의 자유를 언제든 경제적 이익과 엿 바꿔 먹을 수 있는 화폐쯤으로 여겨온 기회주의 언론들의 거대 자본에 대한 부역의 역사는 그렇게 20년이 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김중배의 경계(警戒)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이 김용철 변호사의 신간 와 관련한 외부 필자 칼럼을 통째로 드러낸 사건은 이른바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신문들까지 자본의 손아귀에 멱살 잡힌 현실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게 한다. 부자 언론은 언론의 자유 따위엔 관심이 없고 가난한 언론은 자유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생존의 벼랑 끝에 ..
달이 차오르면 풀리는 대법원의 ‘포괄적 엠바고’ [미디어스 데스크] ‘수동적 저널리즘’과 ‘적극적 앙갚음’의 결합 한나라당이 ‘예상대로’ 참패한 재보궐 선거와, 그 선거 결과를 ‘국민의 심판’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도 (역사적으로 모든 집권세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6월 미디어관련법 강행 처리 방침과 촛불 집회에 대한 ‘폭력적 법치’ 등을 포함한 자가당착적 헛발질 처방을 내놓은 것과, 14년 만에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가는 스펙터클을 헬기 부감 숏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지난 한 주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풍속이 역시 ‘진부한 다이내미즘’이라는 걸 일깨운 시간이었다. 또한 지난 한 주는 생활계의 귀한 이슈나 나름 사유(思惟)가 필요한 이슈들에게는 이들 진부하거나 다이내믹한 대형 이슈들의 그림자에 가린 짙은 망각의 시간이었다. 지난주, KBS에 대한 대법..
객관주의의 ‘쌩까기’ 기술 [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2007년 11월 05일 (월) 09:36:40 며칠 전 다리가 부러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당대의 건축공학과 산업디자인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댄(아직 한쪽 다리는 멀쩡한) 성인에게 적대적인, 적어도 무자비한 학문이었다.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용변 보는 것조차. 세렝게티의 포식자들이 네 다리 가운데 하나만 부러져도 굶어죽는다더니, 내가 사는 이곳이 곧 정글이었다. 가끔 장애인 관련 기사를 써왔던 경험은 내게 ‘의식’으로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테제만이 더없이 적확했다.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내가 쓴 기사도 달라졌을까? 얼치기 한시 장애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뜻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