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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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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사찰 피해를 바라보며 박용현은 내가 일하는 신문사의 동기이자 벗이다. 그는 얼마 전 폭로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불법 사찰 자료에 ‘ 편집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실명이 특정돼 등장했다. 보도가 나온 날 아침, 흡연 공간에서 그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래, 사생활은 깨끗하냐?” 함께 웃긴 했지만, 뒤통수가 서늘해지면서, 어느새 머릿속은 이 정권 들어서 내가 노상방뇨를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리고 있었다. 언론들의 반응은 처음엔 뜨뜻미지근하다 이내 후끈해졌다. 특별세무조사를 받을 때(김대중 정권)나 기자실이 통폐합돼 합동 브리핑룸이 설치될 때(노무현 정권) “언론의 자유”를 외치며 조건반사적으로 떨쳐 일어섰던 그들이 이제 언론 자신과 관련한 사안에서도 신중해진 것일까. 지상파 3사와 조·중·동은 하루쯤 간을 보다..
누군가의 ‘추억’은 다른 누군가의 ‘아픈 기억’ 언론의 ‘선택적 추억’ 감상하기 인간은 모든 것을 추억하지는 않는다. 추억은 무언가를 과거형으로 송별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현재적 의미로 불러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그 무엇을 환기시키는 욕망의 격발 장치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격발 장치는 다분히 현재형이다. 영화 문법으로 말하자면, 추억은 현재가 과거를 불러낸 시퀀스다. 얼마 전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가 에 쓴 칼럼 제목은 ‘사찰의 추억’이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과 관련한 글이었다. ‘추억’이 낭만성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면 이 제목에서 추억의 주체는 곧 ‘사찰’의 주체다. 사찰을 당했거나 사찰을 목격한 이가 사찰을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영화 에서 추억의 주체는 영화 속에서도 끝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