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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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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4대강의 삼류 연극 무대 “저건 나비다!” 일행 중 누군가 내뱉은 말은 서술보다 탄식에 가까웠다. “어디 어디?” 사람들의 눈길이 손끝을 좇아 가파른 산허리와 물길을 허공으로 가로질렀다. 곧 “큭!” 하고 급히 끝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허!” 하며 꼬리를 끄는 소리도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거기 나비가 한 마리 있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익룡보다 터무니없이 큰 나비가, 그나마 익룡 화석보다 훨씬 볼품도 생기도 없게, 무려 황토 바닥에 납작 눌린 형상으로, 적나라하게. 경북 상주시 경천대와 (4대강 사업으로 들어선) 상주보 사이 낙동강에는 너른 습지를 품은 하중도(河中島)가 있었다. 이 문장의 시제가 과거형인 것은 섬 때문이 아니라 습지 때문이다. 섬은 남았고, 습지는 사라졌다. 상주 사람들은 이 섬을 ‘오리섬’이라..
아시아에서 비구니가 보내는 편지 이 글은 필립 퐁스 도쿄 특파원이 달포 전쯤 상주 낙동강을 찾아가 지율 스님과 인터뷰한 내용으로, 지난 12월 4일 에 게재됐습니다. 한국판 번역위원인 박지현 국제남극보호연합(ASOC) 한국지부 캠페이너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자신들의 토건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금도 지율 스님을 마녀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나라 정치인들과 언론들, 매판 지식인들은 앞으로 불매 운동을 전개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도 번연히 아는 이치를 저들 윤똑똑이들은 몰라라 합니다. 모래톱 위에 몸을 숙인 채, 그녀는 흐르는 강물에 손을 맡기다, 이내 물길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고운 모래를 한 줌 쥔다. 이곳은 서울 남동쪽에서 200km 떨어진 낙동강. 유유히 장엄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는 크게 굽이쳐 ..
‘녹색’이 만들어낸 ‘녹색의 사막’ ‘훅’에 쓴 글입니다. 1. 환유와 장자몽 직유나 은유가 실체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철저한 이원론이라면, 환유는 오히려 일원론에 가깝다. 직유와 은유는 이들의 관계에 우와 열의 위상차를 부여하지만, 환유에서 둘은 동격이다. 정신분석학이 한갓 은유의 서사라면 간밤의 생생한 꿈은 내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지몽은 뭐란 말인가. 굳이 욕망과 억압의 관계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꿈과 현실은 투사이거나 조응으로서 환유다. 환유는 비유법을 넘어서, 장자몽처럼 서로 뒤챈다. 얼마 전 나는 그것을 낙동강에서 새삼 깨달았다. 2. 녹색이 녹색을 죽이는 이치 지율 스님은 먼 곳을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스님의 손끝이 멀리 뉘엿해지는 햇살 아래 강을 건너갔다. 방천 뒤로 펼쳐진 수풀은 조신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