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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콘’은 내 행복욕망을 자극한다


나는 이 글을 비자발적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고 <개그 콘서트>를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상파 예능프로그램 가운데 방송시간을 기억해 찾아보는 프로그램이 개콘 말고는 없다.) 애초 이 글이 내 몫이 아니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뿐이다. 나는 정연주 전 KBS 사장에게 개콘에 대해 글을 한 편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우선은 재판 준비에 바쁘고, 다음은 좀 쉬고 싶고… 그 다음은 언젠가부터 글을 쓰게 될 터인데, 이제는 누구 주문이나 주어진 틀 속에서가 아닌, ‘내 글’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이해해주구려.”

거절은 했지만, 적어도 ‘KBS 사장까지 한 대선배에게 어떻게 코미디 프로그램에 대한 글 따위를 써달라고 하느냐’ 식의 역정은 결코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가 개콘을 글감 삼은 ‘내 글’을 쓸 거라고, 나는 본다. 그는 ‘개콘 마니아’다. 그가 <한겨레> 논설주간에서 물러나는 퇴임식에서 했던 인사의 마지막은 “분위기 다운되면 다시 돌아온다”였다.

나는 그가 글을 써줄 것을 기대해 미리 부제부터 정해뒀었다. ‘정연주의 <개콘> 예찬론’. 당선소감부터 미리 써놓고 덤빈 신춘문예에서 미끄러진 것마냥 겸연쩍었지만, 그 60대 선배로부터 돌아온 “아직도 개콘을 좋아한다”는 선선한 대답에 나는 안도했다. 개콘 하나가 주말기획 전체를 감당할 만한가 싶었던 의구심이 풀렸기 때문이다. <미디어스>의 기획이 ‘오버’는 아니었다. 개콘은 세대를 ‘횡단’하고, 난 내가 쏜 총알의 유탄을 기꺼이 맞았다.

▲ 개그콘서트 홈페이지 캡처.

  
20대 때 나는 사뭇 진지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멀리했었다. 텔레비전은 지성의 매체가 아닐 뿐더러 감성의 매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바보상자이면서 그 옅은 지적·감성적 역량을 무차별로 유포하고 강제해 마침내 내면화하는, 하향 평준화된 교과서였다. 장르는 국영수냐 암기과목이냐 정도의 구별이었을 뿐, 말하자면 코미디 프로그램도 웃음을 밑줄 그어 ‘외우게’ 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만큼 텔레비전은 곁눈질로 야금야금 다가왔다. 텔레비전과 내외살이는 불편한 안락이었다. 의식이 퇴조하는 만큼 정확하게 나태가 확장했다.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러댔지만 어느 것 하나 주목하지 않았다. 권태를 죽이기 위한 도구가 권태의 일부가 되어 가는 아이러니를, 나는 수수방관했다. 코미디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로지 웃기겠다는 집단행위와 웃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개체 사이 비대칭의 조우를 리스크 없는 불가항력으로 수용해갔다.

그러다 개콘을 만났다. 30대라는 생물학적/사회학적 나이에 익숙해갈 무렵이었다. 전유성, 김미화 두 낯익은 개그맨/개그우먼과 처음 보는 남녀 젊은이 너댓이 신소재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화면에 등장했다. 10명 미만의 이 신/구 개그맨/개그우먼들은 여러 꼭지에 반복적으로 출연했고, 사바나 지역 공동체 사람들로 분장하든 이 도령과 성춘향을 연기하든 반드시 맞춤 트레이닝복을 받쳐 입었다.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출연자들이 모두 나와 그날 코너들을 애드리브로 비틀어 재구성하며 자기들끼리 깔깔댔다.

내가 기억하는 초창기 개콘의 모습은 그랬다. 신선했다. 그것은 중고등학교 학예회 무대를 텔레비전 수상기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학예회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엉성한 분장에 조악한 대사…. 친구들이 연기하는 코미디는 배꼽을 잡고 강당 바닥을 뒹굴게 했다. 나중에 전해들으니, 그런 포맷의 공연이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다고 했는데, 난 개콘을 보며 무람없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떠올렸다. 개콘 출연자들은, 보기에,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난, 즐겼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웃음은 그 사이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듯했다.

그 뒤 개콘이 포맷을 조금씩 바꿔가며 어느 제약사 광고처럼 생명연장의 꿈을 근면 성실하게 추구하자 그 고유함도 차츰 빛을 잃어갔다. 비슷한 포맷의 경쟁 프로그램들이 생겨났고, 자기들끼리 잘도 혼성모방을 해갔다. 개콘이든 다른 경쟁프로그램이든 모두 암기과목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개콘은 전성기를 지난 여배우가 보톡스 주사를 맞고 붓기 덜 빠진 얼굴로 어린 후배들과 미모와 재치를 겨루는 것처럼 비쳤다. (요즘 말로 안습이었다.) 개콘은 내 권태감의 일부가 되어 갔다. 해마다 내 배는 더 불러오고, 팔다리는 가늘어져 갔다.

개콘의 존재감은 40대가 된 내게 예고없는 재난처럼 다시 들이닥쳤다. 숫제 사적인 이유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눈뜨면 혼자 술 마시고 취하면 혼자 잠들기를 되풀이하던 때였다. 그날도 늦잠에서 깨어나 라면을 끓여놓고 소주부터 들이켜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텔레비전 리모컨 켜짐 단추를 눌렀다. 유선채널에서 개콘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소주 한 잔, 라면 한 젓가락의 기계적 동작을 이어가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화면 어느 한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다.

왜 그 순간 맞은편 벽에 거울이 걸려 있었을까. 부스스한 머리에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눈꼽 위로 눈물까지 흘려가며 파안대소하고 있는 내가 그 거울 안에 있었다. 낯설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였다. 거울이 재현한 나는 “행복하고 싶어 미치겠어. 넌 그렇지 않니?”라고 주인에게 묻고 있었다. 난 머리를 감고 면도도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아 누군가에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난 지금 행복하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난 집에서 ‘리모컨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굳이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큰딸아이의 집요한 리모컨 욕망과 겨룰 재간이 도통 없기도 하다. 큰딸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 우리집 텔레비전은 거의 대부분 유선방송 대중음악 채널에 고정돼 있다. (심지어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때도 우리 가족은 음악방송을 봐야 했다.) 나와 어린 둘째딸아이는 하릴없이 음악방송을 지켜보다 큰딸아이를 자지러지게 하는 빅뱅이나 샤이니가 나오면 약속이라도 한듯 이죽거린다. “뭔 춤이 저래?” “저게 노래야?” 그러고 나면 매번 2대1의 말싸움이 벌어진다.

하지만 큰딸아이가 유일하게 리모컨을 양보하는 때가 있으니, 그게 바로 일요일 밤 10시다. “아빠 개콘 할 시간이야” 하고는 제 방으로 휙 들어간다. (그건 지배자의 통치기술이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채널을 돌린다. 개콘을 넋을 잃고 보다 보면 어느새 큰딸아이도 옆에서 깔깔거리고 있다. 20대 때만큼 진지하지도 않고, 30대 때만큼 과시할 자원도 없는 나는, 개콘을 보며 행복을 욕망한다. 삶이 지옥일지라도 살아야만 이길 수 있다는 주술을 되뇌며, 끝없이 승리를 유보 상태로 묶어둬야 하는 내게, 개콘은 주기적으로 방문해 묻는다. “넌 행복하고 싶지 않니?”

지금 내가 보는 개콘은 10년 전에 처음 봤던 개콘은 아니다. 하지만 난 개콘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 개콘과의 재회는 우주유영하다 다른 우주인과 랑데부한 것만큼이나 우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인연을 쉽게 내치지 못할 만큼 연륜의 더께가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10년 전만큼은 아니어도, 개콘 출연자들은, 그런대로, 보기에, 자기들끼리 잘 논다. 몇몇 코너의 정치 풍자는 독보적이어서, 한국 코미디의 미래를 제시한다. 그럼에도 두어 개 코너의 클리셰에서는 한국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묻어나, 그때마다 잠깐씩 리모컨을 돌린다. 그건 내가 아직은 진지하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자기암시인지도 모르겠다.

쓰다 보니 나와 개콘 사이의 헐거운 연대기가 되고 말았다. 난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개콘에 대한 세대론적 분석을 시도할 뜻이 없었다. 세대론은 비공시적인 것들의 공시성이라는 인간사회의 한 특성을 포착한 개념이어서, 한 세대에 발담근 자가 객관주의의 깔대기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가족은 세대를 횡단해, 일요일 밤 다함께 개콘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나안~ 개콘이 좋을 뿐이고!”

※ 글을 마치려다 정연주 전 KBS 사장에게 묻지 못한 게 떠올랐다. “개콘을 왜 좋아하시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