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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김진숙 지도’가 그린 별자리

거리의 투사로 변신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어느덧 보도사진 속에서 홀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사각 프레임을 가득 메운 지지자 무리는 황 대표 독사진의 기호학적 배경일 뿐이다. 여기 예외적인 사진 한장이 눈길을 끈다. 현장은 지난 9일 울산 울주 새울원자력본부 건물 앞. 황 대표 주위에 병풍을 선 이들은 붉은색 ‘단결 투쟁’ 머리띠에 똑같은 조끼를 갖춰 입고 있다. 손에는 ‘신한울 3, 4호기 건설 즉각 재개하라’고 쓴 팻말을 들었다. 한국수력원자력 노조원들이다. 이들의 이미지 위상은 단지 배경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진 구도로 보아 황 대표와 어깨 겯고 문재인 정부에 선전포고하는 모양새였다. 이들이 집단으로 황 대표를 지지하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흥 극우 정치인과 이익동맹을 맺은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러나 노조도 본질에서는 이익집단 아닌가.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파시즘을 추종하는 노조도 있었다. 한수원노조의 정치 윤리를 따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들이 처한 ‘곤경’을 비판적으로 짚는 일이 지금 더 중요하다. 오늘날 ‘노동의 곤경’이 어느 누구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핵피아’가 발버둥 쳐도 원전의 운명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정해져 있다. 얼마 전 <조선일보>가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보도를 정반대의 취지로 버젓이 인용한 것은 초조함에 빠진 핵피아의 자기 고백으로 읽힌다. 슈피겔은 독일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의지와 속도가 충분하지 못한 점을 비판했다.(에너지전환포럼 보도자료)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슈피겔이 독일 정부의 탈원전 과욕이 참사 수준의 실패를 낳았다고 질타한 것처럼 보도했다. ‘채찍질’과 ‘박차 가하기’를 ‘제동 걸기’로 뒤집은 셈이다.

‘신한울 3, 4호기 건설 즉각 재개하라’는 한수원노조의 주장도 조선일보의 ‘뒤집기 신공’에 뒤지지 않는다. 신한울 3, 4호기는 건설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계획 단계에서 접은 것이다. 착공도 하지 않은 원전 공사를 재개하라는 건 불가능한 요구인데, 이것은 프랑스 68혁명의 ‘불가능을 요구하라’는 구호와 성격이 정반대다. 68혁명의 요구가 체제 내부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는 데서 출발했다면 ‘원전이여 영원하라’는 한수원노조의 요구는 체제 내부의 폐회로에 갇힌 주술이다. 체제 내부는 이미 곤경에 처해 있다.

화석연료를 에너지 기반으로 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대량 고용의 20세기 모델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빠르게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수원노조가 맞닥뜨린 곤경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비롯됐다. 13일 현대자동차 노사가 울산시와 함께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2025년까지 내연기관차 생산 비중 감소에 따른 인력 감소가 2700여명에 이를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회사가 아닌 노조의 추정치여서 시사하는 바가 더 크다. 애초 뾰족한 해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이들은 급변하는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2011년 당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류우종 기자

얼마 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철의 노동자’의 투병 소식에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들었던 그의 외침이 떠올랐다. 그 소리는 깊게 울리는 쇳소리였다. 정리해고를 막아낸 그는 309일 만에 방울토마토와 상추, 치커리를 들고 내려왔다. 크레인 위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였다. 이듬해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정당으로 녹색당을 찍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더 멀리 내다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김 지도의 내다봄은 철학자 앙드레 고르의 ‘정치생태학’과 깊이 닿아 있다. 고르는 자본주의가 채택한 자동화와 정보통신기술이 어떻게 체제 내부를 곤경에 빠뜨리는지, 그 대안으로 왜 생태주의가 부상하는지를 이론으로 정립했다. 김 지도의 내다봄과 고르의 이론이 오늘 노동하는 이들에게 유일한 경전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성층권 바깥의 별들 사이에 선을 긋듯이 체제 외부로 전망을 확장하는 태도를 눈여겨볼 일이다. 물론 그것을 극우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은퇴 뒤 텃밭을 가꾸며 살고 싶다던 김 지도의 바람이 꼭 이뤄지기를 곡진하게 빌어본다.

※ <한겨레> ‘아침 햇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3861.html

 

[아침 햇발] ‘김진숙 지도’가 그린 별자리 / 안영춘

거리의 투사로 변신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어느덧 보도사진 속에서 홀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사각 프레임을 가득 메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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