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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외설스런 블랙리스트, 비장한 성희롱

7월에 써놓은 글인데, 이제야 포스팅을 한다.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한 상태(지금도 마찬가지지만)에서 쓴 글이어서, 엎어진 쓰레기통 같다.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버리려고도 해봤지만 이 또한 내 흔적인 것을….
다음엔 잘 쓰면 될 거 아닌가, 라고 자위하며….

상업 언론의 호들갑은 이따금 코미디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요즘 한국 언론의 데시벨이 높은 것을 언론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어도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저널리즘의 경구를 떠올릴 것도 없다. 세상이 코미디라면 그 세상을 재현하는 언론도 구조적으로 코미디 장르를 벗어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추문’이라는 이름의 꽃밭에 한꺼번에 꽃이 피고 있는 형국이다. 현 정권 구성 세력을 비롯해 한국 사회 부동의 주류 세력 축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추문에 나 같은 냉소주의자조차 눈길을 빼앗기는 마당에, 언론이라는 벌떼가 꿀을 포기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언론도 분명히 했으면 한다. 작금의 사태는 일탈의 연쇄가 아니라 추문의 메들리라는 사실 말이다. 일탈은 ‘벗어나는 것’이고, 추문은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잦은 일탈이라도 그 행위는 비연속적인 사건일 뿐이다. 말뜻 자체가 비일상성을 전제한다. 가령 가출이라는 일탈은 일상에서 벗어난 귀가 유예 상태다. 반면 추문은 설령 일회적이어도 연속적인 일상이 가시화된 단면이다. 손가방을 시도 때도 없이 떨어뜨린다고 해서 손가방의 소유권을 의심받을 일은 없지만, 손가방이 열리면서 쏟아진 잡다한 내용물은 본래부터 손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며, 손가방 주인의 기호와 취향, 성격 따위로 구성되는 몽타주다.

일각의 규정과 달리,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 정권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 앞에 전시되는 추문들을 봐도 그렇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이처럼 천둥벌거숭이 수준의 패악질이 잇달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치 전범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2차 대전이 끝나고도 20년 가까이 지난 1962년 사형되는 순간 비장하게 “독일 만세”를 되뇌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신념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철저히 대타자의 신념을 내면화한 것이지만, 현 정권에 참여한 인사 가운데 그런 순간 최소한의 비장함이라도 지킬 자가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이 정권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을 찾는 일도 쉽지 않을지 모른다.

국가 권력을 사익 추구에 동원하는 것이 권력의 적나라한 속성이라지만, 이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사익집단의 성격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집단적 차원의 사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집단 안에서 각개전투를 벌인다. 최측근이 최고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려 사찰을 받았다고 해도, 양쪽 모두 그걸 역린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민간인을 사찰해 삶을 송두리째 탈취할지언정, 자기들끼리의 사찰은 야구에서 견제구를 던지는 것 정도다. 남경필이나 정두언, 정태근은 송강 정철이 자신을 저버린 최고 권력자를 향해 부른 통한의 사미인곡 따위는 부르지 않는다. 이들에게 대통령은 피라미드의 일극점이 아니라, 서로의 꼬리를 물고 틀어올린 똬리의 맨 앞에서 머리를 치켜든 ‘고소영 강부자’의 1번 뱀일 뿐인 것이다.

6·2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쏟아져 나온 정부 여당의 추문은 정권의 이런 성격과 구조를 직설적으로 지시한다. ‘일상의 가시화’로서 추문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사태를 ‘레임덕’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단 징후적으로 맞다. <PD수첩> 보도처럼 외부의 탐문에 의해 진실이 들춰지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내부에서 새어나왔을 법한 정황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레임덕은 피라미드 권력구조의 밑동이 흔들리는 현상이다. 지금 사태는 체계적인 동요가 아니라 랜덤한 꿈틀거림에 가깝다. 차기 권력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똬리가 들썩거리는 셈이다.

이들이 벌이는 패악질과 각개전투의 양태는 분명 레임덕의 전형성과 거리가 멀다. 호가호위를 하든 딴주머니를 차든, 이들에겐 애초 절뚝거리고 말고 할 만한 최고 권력자를 향한 충성심이 없었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추문이 잇따르는 배경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일한 지도체제가 강력하게 작동할 때는 좀처럼 추문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내부통제가 잘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부 구성원의 욕망이 곧이곧대로 표출되기가 어려운 것이 더 핵심적인 이유다. 이때 욕망은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수식의 가공을 거쳐 표출된다. 각자의 욕망으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무리에서는 그런 일사분란한 수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 정권이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사적 욕망이 강한 권력일수록 오히려 국가주의 따위의 엄숙한 표정을 짓는 법이다. 대통령이 TV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등 뒤로 태극기들이 도열하는 모습은 현 정권 들어 새로 생긴 풍경이다. 김미화의 블랙리스트 논란이 일자 한국방송이 발표한 출연금지 연예인 명단을 보라. 하나같이 크고 작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한국방송이 연예계에 유일하게 요구하는 것은 방정한 품행이라는 듯이. 그러고도 현 정권은 추문의 꽃밭이고, 한국방송은 선정성에서 사영방송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연출과 수사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건 아니다. 사적 욕망이 너무 강하고 잡다하면 별수 없다. 추문은 당사자의 일상성의 단면이자 몽타주다. 한국방송은 ‘리스트’란 공식 기록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김미화의 내레이션이 정확성이 떨어지고 작위적이어서 출연을 중단시켰다고 보도하는 한국방송 9시 뉴스 리포트는 훨씬 더 부정확하고 작위적이었다. 시청자에게 종방 안내도 못하고 끝나야 했던 <책을 말하다>의 출연자 진중권에 대해서는 어떤 잣대도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방송은 김미화(와 진중권)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명단을 발표했겠지만, 정작 자리를 보전하고자 하는 사내 권력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방송의 명단은 외설적이었다.

얼마 전 <조선일보> 고정 필진인 한 대학교수가 인터넷에서 추문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한 인터넷 게임의 폐해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 게임의 캐릭터를 불법적으로 거래했다가 매도자에게 모두 털리고 심지어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피해 사례를 제시하며, 게임물 심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돈을 털린 당사자이고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이는 그의 친구인 다른 대학 교수라는 사실, 심지어 그는 문제의 게임을 통과시킨 심의위원이었다는 사실이 금세 드러났다. 엄숙한 칼럼의 이면은 이처럼 외설적이었다. 아니 칼럼이 외설 자체였다. 현 정권 구성 세력은 아니지만, 한국의 젊고 스마트한 인텔리 보수주의자의 상징처럼 돼있는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의 이야기다. 하루 6300원으로 황제의 밥을 먹은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이나, 야당 찍은 젊은이들에게 월북을 권유한 유명환 외무부 장관은 어떤가.

강용석 (아직도 현역) 의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부 여당의 유일한 내부 고발자(였)다. 공식석상이어서 잘못이라는 남성 진영과 한국 남성 지배체제의 인지적 병리현상이라는 여성 진영의 젠더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솔까말’에 애초 엄숙주의 따위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한국 사회 남성 욕망의 대타자가 되기를 자처했고, (아직도 현역 의원이지만) 나름 장렬하게 산화했다. 그리하여 압도적 다수 남성의 은폐된 욕망과 허위를 폭로하고 극소수 남성의 성찰( 블로거 ‘돌아온 마테우스’의 글 http://blog.aladin.co.kr/747250153/3950540 일독을 권함)을 이끄는, 어쨌든 매우 비장해 보이는 불의의 결과를 낳았다.

물론 강용석 (아직도 현역) 의원은 그가 현역 의원인 이상 여전히 안녕하다. 다음 선거에서 공천을 못 받아 낙선하더라도, 대한민국 최고 법대 출신 남성 변호사인 그는 내내 안녕할 것이다. 그리고 앞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현 정권 구성 세력을 비롯해 한국 사회 부동의 주류 세력들은 앞으로도 지뢰밭이 터지듯 계속 추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어떻게든 계속 안녕할 것이다. 아니, 그래서 더욱 안녕할 것이다. 추문은 지속적인 일상이 단면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기에, 오늘 터지는 추문은 그들이 오늘도 지배세력으로서 안녕하다는 뜻이며, 미래의 추문 사태를 예견하는 건 앞으로도 내내 안녕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 그들은 계속 권력으로 선출될 테니까. 그것이 바로 일탈이 아닌 추문의 역설이다.

* 이 잡설은 7·2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결과 분석에 참조할 수 없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