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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특보’ 이전에 ‘땡전’이 있었다

 자신의 기사가 ‘폭로’돼야 하는 기자 출신 공영방송 사장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은 한국 기자들에게 더없이 맞춤한 경구다. 서구 유력지 기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의 권위자들이지만, 한국에서는 ‘전문기자’라는 호칭조차 아직 낯설다. 한국 기자들의 분야는 출입처에 의해 구획되고, 출입처 간에는 위상차가 뚜렷해, 사다리를 오르듯 출입처를 옮기는 것이 기자로서 성공하기 위한 숙명의 길이다.

위의 경구는 요즘 들어 중의적인 뜻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과거 행적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구르고 또 구르는 기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새로 KBS의 사장이 된 인물이 그런 경우다. 그는 방송 기자를 하다 정치판에 뛰어들어 대통령 후보 특보 노릇을 해놓고, 다시 공영방송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취임 일성이 “권력으로부터의 방송 독립”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인물이 그 권력으로부터 방송 독립을 지켜내려면 이중삼중의 고통이 따를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따위의 연고주의 그물에 갇히지 않으려면 인간성에 대한 평판은 애초 포기하는 게 좋다. 무슨 일을 해도 정치적 중립을 의심하는 따가운 시선을 받을 테니, 그에게 필요한 건 용기보다는 두꺼운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기자 시절 그의 행적을 알고 나면 그의 마음고생에 대해 괜한 걱정을 했다 싶어진다. 최근 KBS 기자협회 블로그 ‘싸우는 기자들’(http://kbsjournalist. tistory.com/)에 그의 과거 뉴스 리포트와 다큐멘터리가 연일 ‘폭로’됐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독재를 찬미했던 영상기록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기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는 정치권으로 가기 전부터 기자보다는 확실히 정치인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방송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할 일은 없을 게 분명하다.

기자는 당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史家)이기도 하다. 그날그날 보도한 기사는 훗날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한 사초(史草)가 된다. 보도 당시 그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자가 남긴 보도를 ‘발굴’이 아니라 ‘폭로’해야 하는 현실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폭로 대상이 한 나라 공영방송의 수장인 현실은 끔찍한 비극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무감해 보인다.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를 놓고 공영방송이 시비의 대상이 되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념이라고는 강자만을 좇는 기회주의가 유일한 언론인에게 용비어천가는 논란거리는커녕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어쩌면 그는 구르는 돌이 아니라, 그 스스로 저널리즘 암흑기에 번성한 음지식물, 바로 이끼였는지 모른다. 그의 이름은 김○○이다. 빈칸 두 자리는 독자께서 직접 채워보시길.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65호(2009-12-07)에 실린 글입니다.

KBS 기자협회 블로그 ‘싸우는 기자들’ 대문화면. 포스팅된 콘텐츠 대부분이 ‘관리자에 의해 제한된 글’로 바뀌어 내용을 볼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