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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누가 김제동을 잘랐을까?

정치권력의 압력만으론 부족…방송사 내부 적극적 부역 주목

연예인 김제동의 인기는 그의 작은 눈과 토끼 이빨에서 나온 게 아니다. 지금 KBS 사장이 언론계에서 욕을 들어먹는 이유가 그의 2대8 가르마에 있지 않듯이. 내 눈에 김제동은 한국 예능프로그램 진행자 가운데 재치와 순발력에서 가장 뛰어나다. 유재석과 강호동은 다른 출연자와의 관계·소통 방식이 요즘 방송 포맷에 잘 맞아떨어질 뿐, 프로그램을 이끄는 개인적 재능에서는 김제동에 크게 못 미친다. 그리고 김제동의 재능은 의식과 동행한다.

“방송은 시청자 여러분의 것”이라는 방송사들의 입에 발린 말을 곧이듣지 않더라도, KBS가 김제동을 하차시킨 것은 반 시청자적 행태이기 전에 자해적 행위다. “우리 방송 우리가 망가뜨리겠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말은, 적어도 국민 세금과 시청료로 굴러가는 공영방송사가 할 소리는 아니다. 재능도 없고,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줄 깜냥도 없는 방송사 높은 분들이 김제동을 두부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건 정의의 감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방송사의 이런 권력은 무엇보다 하드웨어의 희소성에서 나온다. 전파의 대역범위가 한정되어 있기에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대체 도로도 없고 통행료도 없으면 고속도로 요금 징수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듯이, 연예인도 방송사의 칼끝에 매달리게 된다. 그럼 방송사 사람들도 그만큼 힘이 셀까? 방송사 높은 분들은 외부로부터 독립돼 있을 때 힘이 세고, 같은 조건 아래서 내부가 민주화되면 실무 제작자들의 힘도 세진다.

그러나 방송사의 권력도, 방송사 사람들의 권력도 과거형이 돼가고 있다. 수십 개의 유선채널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위성채널에 IPTV까지, 이제 대체 하드웨어는 차고 넘친다. 21세기 탈영토 시대에 소프트파워의 연예인을 하드파워의 방송사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농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힘의 무게추는 이미 방송사에서 연예기획사로 넘어가고 있다. 밤이 오는지도 모르고 석양의 권력 감정에 취해 있다가는 밤이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매체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요즘 방송사는 독립성이 크게 위축됐다. 법원에 의해 최근 제동이 걸렸지만, 정치권력은 맘만 먹으면 공영방송 사장도 자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재능 있는 연예인과 영향력 1위의 언론인을 자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어떤 정치권력도 저널리즘 자체를 벨 수는 없다. 물론 방송사 구성원 스스로 저널리즘을 강단지게 지켜낼 때라야 가능한 얘기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배후세력은 시청자다.

김제동이 마지막 녹화를 하던 날, 국회에서는 KBS 기자가 국감장에 불려가는 KBS 사장을 엄호하며 취재진과 몸싸움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작 그 기자가 밀쳐낸 건 자신이 업으로 삼는 저널리즘, 그리고 시청자였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9호(2009-10-19)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