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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후안무치한 공영방송 길들이기

[안영춘/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배임 혐의에 대해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1심이긴 하지만 상급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검찰이 징역 5년이라는 중형을 구형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판결로 검찰의 ‘법 해석’과 ‘사실 확정’이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파렴치범’으로 몰렸던 그는 처벌을 면하는 것을 넘어서 명예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게 바로잡히게 되는 걸까?

인권 변호사인 정정훈 변호사는 법원이 수사기관의 잘못을 바로잡더라도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고 했다. 기막힌 비유다. 정 전 사장은 지금 해고 무효 소송도 벌이고 있다. 이 소송에서도 그의 승소 가능성은 크다. 검찰의 기소 논리와 KBS 이사회의 해고 논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영방송 KBS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가 해고된 뒤 KBS는 완전히 다른 체제로 바뀌었다. 국민의 신뢰도 덩달아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 무죄 선고 직후 카메라 앞에 선 정연주 전 KBS 사장. ⓒ곽상아

 
 
정 전 사장에 대한 해고와 기소는 국가권력의 공영방송 장악 음모에서 비롯됐다는 ‘합리적 의심’을 받아왔다. KBS와 국세청이 벌이던 세무소송에서 승소 가능성이 큰데도 정 전 사장이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임으로써 KBS에 거액의 손실을 입히는 ‘현저한 비위’를 저질렀다는 게 국가권력의 논리였다. KBS 사장은 신분과 임기가 법으로 보장되는데도, KBS 이사회를 친정권 인사들로 재편해 그를 해고한 뒤, 기다렸다는 듯 체포해 끌고 갔다.

법원이 수사기관의 사실 확정을 사후적으로 바로잡는다면 언론은 수사기관과 동시간대에 ‘사실’을 놓고 경합한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정정훈 변호사는 “취재로 드러난 ‘팩트’로 수사상의 ‘팩트’를 견제하려는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한, ‘한 점 의혹 없는 수사’를 주문하는 것은 공허한 말에 그치기 쉽다”고 꼬집는다. 대다수 언론은 ‘취재의 진실’을 알리기보다 ‘수사의 사실’에 확성기를 들이대고, 수사기관보다 집요하게 공격한다.

정 전 사장 사건 보도는 그 전형이다. ‘KBS 정연주 씨, 사장 더 하려 국민에게 1500억 손해 끼쳤나’(7월19일), ‘정연주 씨, 감사원 발표 보고도 계속 눌러앉아 있을 건가’(8월6일), ‘‘방송 독립’ 뒤에 숨은 KBS 정연주 씨의 어제와 오늘’(8월7일), ‘KBS, ‘정연주 방송’에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야’(8월9일)…. 정 전 사장 해임을 전후한 시점에 실린 어느 신문의 사설 제목들이다. 이 신문의 사주는 세금 23억을 탈루하고 공금 25억을 횡령해 실형을 살았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2호(2009-08-24)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