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가 된 글

‘박연차 게이트’ 수사결과 발표의 뒷풍경

이례적 규모 축소와 보도 제한…노 전 대통령 죽음 원인 흐리기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 발표는 사건의 종지부 찍기가 아니라 화룡점정이다. 발표 내용이 피의사실 공표죄와 국민 알권리 사이에서 어떻게 경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형식상 아무리 피의사실로서의 자격밖에 없더라도 대법원 판결과 다름없는 가치로 올라서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정한다. 설령 피의사실이 재판에서 뒤집어지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단죄가 제자리로 복원되지는 않는다. 수사기관이든 언론이든 또다른 사건에 매달려 같은 행태를 되풀이할 뿐이다. 정정훈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법원 판결에는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고 표현했다. (‘칼’의 팩트를 견제하는 ‘펜’의 팩트를!)

대검찰청이 오늘(12일) 오후 3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몰고, 그 후폭풍으로 자기 조직의 수장이 옷을 벗는 꼴을 겪고도, 혹은 그랬기에, 수사 결과는 용두사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측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수사 결과 발표 ‘형식’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다.

대검은 브리핑룸에서 중수부장과 수사기획관만 나와 수사 결과만 발표하고, 중수부장실로 자리를 옮겨 언론사별로 출입기자 1명씩만 참석하는 ‘간담회’를 진행한다. 브리핑룸에서는 영상 촬영이 ‘허용’(생중계는 불허)되지만, 간담회 자리에는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다. 발표시간이 오후 3시인 것도 이례적이다. 대개 발표는 오전 10시에 한다. 그래야 석간신문이 빠르게 1보를 전하고, 조간신문과 방송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사를 쓰고 뉴스를 제작해 대대적으로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사건일수록 금요일은 피해가는 것도 관례다. 주말이 되면 기사가 ‘죽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번주를 넘기기도 그렇고, 마지막까지 내용을 꼼꼼히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발표 시간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라고 했단다. 어제는 수사 결과 발표마저 중수부장실에서 하겠다고 통보했다가, 기자들이 반발하자 찔끔 ‘양보’한 것이 그나마 이 정도다.

     

▲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 중인 대검찰청. ⓒ 오마이뉴스 이경태

 
 
이런 형식은 다른 사건들 수사 결과 발표 때와 확연히 비교된다. 지난 1월20일 서울지검이 용산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는 서울지검 대회의실에서 영상장비와 망루 모형까지 갖추고 브리핑을 했다. 일선 수사 검사들도 배석했으며, 방송 생중계까지 허용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연차 게이트 초기 사건인 세종증권 매각 비리 관련 노건평씨 ‘중간’ 수사 결과 발표(지난해 12월22일) 때는 발표 장소가 대검 중회의실이었고, 과장급 검사들까지 배석해 ‘진용’을 갖췄다. 이것이 바로 검찰이 수사 결과 발표를 활용하는 전형적 풍경이다. 전직 대통령 기소를 장담했고, 국세청 세무조사 기간까지 포함하면 1년 가까이 저인망 쌍끌이로 진행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 발표의 형식은 너무 ‘겸손’하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 형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는 복잡한 속사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잡은 ‘혐의’를 선양(煽揚)하여 이데올로기적 단죄를 노리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검찰은 오히려 소리소문 없이 수사가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사건이기에 ‘추모’ 또는 ‘자숙’의 제스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점들에서는 언론들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방송사들은 메인뉴스에 서너 꼭지 정도 리포트를 내보낼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아 우승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보다 기사 가치를 훨씬 낮게 매기는 셈인데, 거기에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번민’이 있겠는가.

어제는 법무부가 ‘수사공보제도 개선위원회’를 발족했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언론계, 학계, 시민단체, 공무원, 법조계 등 관련분야 각 직역을 대표하는 13명이 위원으로 선임했다고 한다. 이들은 언론보도와 관련해 피의자, 참고인 등 사건관계인의 인권보호 강화를 위한 제도개선 작업을 독자적으로 벌일 거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수사 브리핑 △사건관계인의 초상권 보호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 문제 △수사상황 유출 문제 등에 대한 기준을 내놓을 거란다. 사문화된 법규와 원칙없는 브리핑/보도에 따른 인권침해의 폐해가 심각한 만큼 이 위원회가 큰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새로운 기준이 얼마나 비슷한 피해를 줄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위원회 탄생의 배경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있다. (법무부는 직접 거론하기가 불편했던지, “박연차 회장 정·관계 로비사건 수사를 계기로”라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그동안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어도 이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논의가 진지하게 이뤄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노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선택이 남긴 선한 영향이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미치는가 싶어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기준은 자칫 수시기관과 언론에 면죄부로 악용될 수도 있다.

문제의 본질은 ‘공보 제도/기준’이 아니다. 아무리 촘촘하게 기준을 마련한다고 해도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구멍은 수없이 많이, 그리고 넓게 뚫려 있다. 검찰이 언론 플레이로 피의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단죄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강화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지 않는 한, 언론이 선정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검찰 발표를 정치적 보복 수단으로 악용하는 속악한 자세를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공보 제도/기준은 한층 세련된 게임룰일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을 검찰의 수사 발표와 언론의 보도 ‘형식’으로만 환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세상 민심은 그것을 ‘정치적 타살’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가 말이다.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