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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환과 유인촌은 경우가 다르다

민주당의 반응은 지나친 게 아니라 번지수가 틀렸다 

 
고등학교 쉬는 시간에 까까머리 사내녀석 둘이 교실 한귀퉁이에서 담임 선생님을 흉본다.

“우리 담탱이 미친 놈 아냐?”

그러다 열린 문으로 슬쩍 들어온 선생님한테 들키고 만다.

당신이 그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군사부일체”를 운운하고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다 “내일까지 부모님 모시고 와”라고 할 텐가, 아니면 속으로 분을 삭이며 못 들은 척할 텐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같으면 곧바로 주먹과 발길을 날렸을 테지만, 폰카와 인터넷 하나면 기록하고 전파하지 못할 것이 없는 요즘 세상에 그럴 수는 없을 테고….

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지막히 말하는 거다.

“담탱이 욕하는 놈 치고 정신 멀쩡한 놈 못 봤다.”
아니면,
“한 번 봐준다. 다음에 내 욕할 땐 교문 밖에서 해라.”

같은 날 종례 시간에 그 반 일진 먹는 녀석을 나무라고 있는데, 그 녀석이 갑자기 옆에 앉은 똘마니 뒤통수를 갈기며 소리지른다.

“야이 ××야. 내 옆자리 앉지 마. 성질 뻗쳐서, 씨~ㅂ!”

이번엔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에게 소리지른 게 아니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훈계 마저 하고 끝낼 텐가, 아니면 “왜 힘없는 애 괴롭혀”라며 화를 낼 텐가, 그도 아니면 헛기침 한번 하고 별안간 “종례 끝. 반장~” 할 텐가?

나라면 교칙에 따라 엄하게 처벌 절차를 밟을 것 같다. 이거야 말로 리더십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다. 사제간의 인간적인 정리는 인격적으로 풀어야 할 그 다음의 문제다.

     

▲ 한겨레 4월 29일자 2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미친 놈”과 “이거 근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해” 발언 논란이 위의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운지는 금세 답이 나온다. 유 장관은 분명 천정배 민주당 의원에 ‘대해’ 욕을 했다. 옆에 앉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만 들으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이크를 타고 추상 같은 국회의원들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그것도 뒤늦게 ‘다시보기’를 거쳐서.

그 욕을 한 자리가 한·미 FTA를 날치기 처리 하기 위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였다는 것은 이 사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변수도 되지 못한다. 하필 장학사가 학교에 오는 날 교실 한귀퉁이에서 담임 선생님 욕을 했다고 해서 행위의 경중이 달라질 수 없는 이치다.

원래 국회에 대한 태도가 불손했다고? 품행이 방정하지 않은 학생이라고 해서 몰래 선생님 욕하다 들킨 걸 더 세게 처벌할 수는 없다. 유 장관의 행위는 삼권분립의 어느 한자락도 훼손한 일이 없다.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은 자기들끼리의 학예회 역할극일 뿐이다. 무슨 이유로든 그건 사적인 ‘사고’였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거나, 성장 과정에서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비뚤어졌거나, 아니면 세태가 그 모양인 거다.

난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과유불급’의 사태가 불만스럽다. 지나쳐서 오히려 못미치기 때문이 아니다. 번지수가 틀렸기 때문이며, 그 틀린 번지수가 본질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 비준안 상임위 통과 문제를 놓고 열린 그 자리는 정작 천정배 의원을 비롯해 뜻하지 않게 유 장관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이들이 지난 정권에서 합작한 기획물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키려 해도 어차피 의석수로는 안 되는 일. 난 유 장관의 실수에 기대어 그들에게 행여 면죄부가 주어질까 봐 못마땅하다.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이 전혀 다른 문제를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하는 이들이 큰 나랏일을 맡고 있는 것 같아 영 찜찜하다는 것이다.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이 지난해 국정감사 자리에서 대놓고 기자들에게 막말을 했을 때, 야당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이번 사태만큼 진정성을 가지고 대응했는지 의문이다. 유인촌 장관은 국회의원들을 욕보이기 위해 애먼 기자들에게 막말을 한 것이다. 모욕을 당하고도 모욕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건 무척 처연한 노릇이다. “개새끼”는 욕이고 “견공 자제분”이나 “개아범”은 욕이 아닌가.

정말로 국회가 일개 국무위원에게 능멸당했다고 믿는다면, 그보다 훨씬 심하게 일상적으로 능멸당하고 사는 수많은 유권자들부터 돌아볼 일이다. 그들은 오늘도 용산을 비롯해 여의도 바깥 거리에서 죽어나가거나 붙들려 가고 있고, 일터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눈물바람으로 시름하고 있다. 당신들로부터 잊혀진 채로. 국무위원의 ‘실수’ 하나에 결연히 떨쳐 일어서는 그 결기를 더 모으고 키워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기 바란다. 이상 끝!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