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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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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로 본 언론의 낯선 초상 손석희 앵커와 나 사이의 격차(차이가 아니다!)를 꼽으라고 하면 금세 백 가지도 넘게 댈 수 있겠지만, 이태 전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하고 남지 않을까 싶다. 2015년 4월 어느 날, (JTBC)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기자와 전화로 나눈 대화 목소리를 메인뉴스 시간을 통째로 털어 내보냈다. 날이 밝은 뒤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은 지면에 대화 전문을 공개하려고 이미 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에게 분석을 맡긴 녹음파일을 가 중간에서 입수했고, 유가족의 반대까지 무릅쓰며 ‘시간차 단독보도’를 감행했다. 손 앵커는 보도 다음날 같은 뉴스에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강조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는 알지 않아도 될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지 ..
국정교과서 문제로 본 손석희 현상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5 손석희는 ‘현상’이다. 오늘도 검색창에 그 이름 세 글자를 입력하면 그의 프로그램에 누가 나와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미주알고주알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어뷰징 기사들이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컴퓨터 화면을 스크롤해야만 한다. 어뷰징의 본디 뜻을 그대로 빌리면, 손석희는 “오남용”되고 있다. 사전 풀이에 기댈 필요도 없이, 내 생각도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가 오남용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라는 사실이다.얼마 전 소설가 김훈이 손석희의 프로그램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주어와 동사만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중략) 손석희 앵커가 뉴스를 다루거나 진행하는 것을 보고, 아 저것은 내가 지향하는 문체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했어요.” 김훈은 명쾌하게 ..
형용사가 된 저널리스트, 손석희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4 ‘손석희’와 ‘나’는 뜻하지 않게 ‘우리’가 되었다. 물론 대등한 관계는 아니다. 손석희는 불변의 상수인 반면 ‘나’는 다른 누구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변수다. 그렇다고 나는 썩 범용적이지도 않다. 나가 몇이든 그 쓰임은 손석희와 견줘짐으로써 손석희를 더욱 손석희답게 하는 데 국한된다. 수많은 나는 ‘손석희의 나들’이다. 적어도 우리를 우리라고 불러주는 이들에겐 그렇다.손석희와 나가 우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같은 진영에 속할 필요도 없다. 영미 저널리즘을 사숙(私塾)한 한국 저널리즘은 중립을 표방하는 데 있어 보수와 진보가 대동소이하다. 중립의 포지션으로 ‘사실’의 기치를 세우지만, 정작 펄럭이는 건 ‘이미지’다. 손석희는 그 점에서 탁월한 거고, 손석희와 그밖의 저널리스트들의 차이..
손석희는 현실이다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3손석희의 힘은 ‘중립’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가 중립의 포즈로 가공할 힘을 얻는 건 ‘개입하는 중립’이라는 그만의 ‘예외성’ 때문이며, 그 예외성은 실재가 아닌 이미지 위에서 성립한다. 앞의 두 차례 논의를 요약하면 그렇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것이 있다. 이미지는 헛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헛것이라면 손석희의 힘은 다만 초자연적인 현상일 터이다. 이미지를 진퉁과 짝퉁의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미지는 ‘현실’이다. 심지어 실재와의 이항대립 관계를 넘어서, 현실의 많은 부분은 여러 겹의 이미지들끼리만 구성되기도 한다.가령,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이 한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와 제목이 같은 건 숫제 우연일까. 미드 은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
이미지가 된 슈퍼 저널리스트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2 ‘손석희의 피부색은 희다’라는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내 기준으로 볼 때는 참이고, 백인들 기준으로 볼 때는 거짓일 것이다. 그런데 유전적으로 피부색이 흰 인종집단(내 눈에 백인 피부색은 붉어 보인다)은 다른 인종집단을 ‘유색인종’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의 피부는 색깔이 없다는 뜻인가. 백인은 색이 없는 게 아니라 색의 분류체계 너머에서 다른 인종에게 색을 ‘부여’하는 권력을 쥔 인종이다. 이로써 피부색은 차이가 아니라 위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중립성과 예외성의 정치다. 손석희 하면 떠오르는 건 그의 피부만큼이나 투명한 중립성이다. 그러나 백인이 무색인종이 아니듯 손석희도 무색무취한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개입하되 발을 담그지 않을 뿐이다. 색깔 없는 색, 냄새 ..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1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더는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지난달 이 정확히 언론학자 100명에게 저 질문을 던졌더니 손석희를 꼽은 이가 76명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이었는데, 그가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데 필요한 건 단 1표였다. 합이 100이 되려면 1표씩 얻은 사람이 더 있을 법한데, 신문에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2015년 한국의 언론인은 ‘손석희와 나머지 한줌’으로 이뤄져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내가 그의 영향력을 실감한 건 JTBC가 느닷없이 ‘종편 사둥이’에서 벗어나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JTBC 기자들의 표정에서 한국 저널리즘의 최후 보루가 된 것 같은 비장함이 내비쳤을 때보다는 정도가 덜했다. ..
‘까방권’으로 시작하는 셀럽 이야기 ※ 한동안 셀러브리티(셀럽)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셀럽 현상이 현재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력한 분석 틀이라고 여긴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까방권’이라는 누리꾼 용어는 아직 국립국어원 ‘신어사전’에는 등재되지 못했지만, 네이버 ‘지식인 오픈국어’에 낱말의 뜻과 다양한 파생 용례뿐 아니라 발음 규정(‘꿘’이 아니라 ‘권’이다)까지 친절하게 소개돼있다. 까방권은 ‘까임 방지권’의 축약어로, “한 번의 활약으로 다른 잘못에 대한 비난을 면제받는 권리”라고 한다. 이토록 탐나는 무형의 증서를 발급받은 이가 누굴까 봤더니, 버전이 오래된 탓인지 안정환, 이승엽이 예시돼있다. 나는 몇 해 전 김연아가 그렇다고 들은 적이 있다.사전은 이 낱말의 기원을 중세시대 ‘면죄부’에서 끌어오는데, 아무리 유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