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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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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죽음의 해석은 다분히 사회적인 ‘배치’다. “호상입니다”라는 조의에 망자의 사전동의가 있을 리 없다. 사회의 암묵적 합의가 있을 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장삼이사의 극단적 선택은 신병 비관, 실연, 생활고, 수사 압박, 입시 실패 등 정형화된 선택지 중 하나에 기필코 배치된다. 물론, 모든 죽음을 낱낱이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타자의 죽음 앞에 가로놓인 실존의 강을 건너가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타자의 죽음을 산 자의 감정으로만 처리하면서 그걸 애써 ‘애도’라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실의에 빠진 돈키호테를 향해 산초는 “슬픔은 짐승이 아닌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슬픔이 지나치면 사람도 짐승이 돼버린다”며 나무란다. 진정한 애도에는 멜랑콜리(슬픔과 우울)를 넘어서려는..
세월호, 절대적 슬픔과 과학적 진실 눈송이는 굵고 다습해 보였다. 어느덧 서울 벚꽃도 얼추 졌는데, 불과 열흘 전 여론면엔 폭설 사진이 실렸다. 기상청도 놓친 ‘꽃샘 눈’ 풍경 사진인가 했더니, 청와대 분수대 앞 피케팅 사진이었다. 우산을 쓴 채 피켓에 쌓인 눈을 쓸어내는 이의 손 아래로 ‘세월호’ 세 글자가 또렷했고, 나머지 글귀는 눈에 덮여 희부옇다. “급선회 원인과 승객 구조 방기의 이유를 규명하라!” 급작스러운 강설에 방금 샀는지, 우산 끝엔 보증서 꼬리표가 매달려 있었다. 사진 제목은 ‘세월호 7주기에 부쳐’. 1월28일에 촬영했다는 설명이 붙었다. 더는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고 맞을 수 없게 된 4월의 문턱에서, 지난겨울 사진이 지면에 소환된 거였다. ‘철 지난’ 사진이긴 하지만, 세월호의 ‘오늘’을 포착한 이만한 시각적 메타포도..
저 오토바이에도 리본을 달아주세요 지난 주말 저녁 가족과 외식하러 가는 길에 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왕복 6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오토바이 넉 대가 잇따라 보행 신호를 어기고 지나치더니, 좌우로 교차하는 차량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네거리를 빠져나갔다. 이들 ‘거리의 무법자’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다. 첫째, 소형 스쿠터를 타고 있었다. 둘째, 플라스틱 배달통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이들은 곡예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계를 향해 각개로 사선을 돌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짓 점잔을 빼는 할리데이비슨 동호회는 생계용 주행과는 애초 무관한 존재들의 집합체다. 상당수가 음식점 배달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폭주족조차 떼 지어 곡예를 펼치는 동안엔 순수 유희집단이 된다. 배달 플랫폼 노동자들만이 오직 ..
낯선 죽음, 낯선 물음 죽음은 체험을 통해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구도 경험 삼아 죽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죽음은 사회적 경험 과정을 거쳐, 살아 있는 이들에게 익숙한 무엇이 된다. 죽음을 자주 접해서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음에 대해 우리 사회에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호상입니다”라고 상주와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인이 그 말에 동의할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음의 해석은 일종의 배치다. 그 메커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언론 보도다. 지하철 선로에 투신한 사람의 자살 동기는 반드시 몇 가지 범주 중 하나에 배치된다. 신병 비관, 실연, 입시 실패, 생활고, 스트레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여전히 낯설다. 얼마 전 한강의 소설 를 다시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
정치적 애도가 본질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나고 처음 만든 에 썼던 기사다. 1년이 지나고 돌아보니 참사 이후의 시간은 그때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나쁜 시나리오가 하나하나 현실화된 시간이었다. 그래서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의 참사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인터뷰 철학자가 본 세월호 참사 애도 [나·들 2014.05 제19호] 세월호 참사는 ‘죄 없는 아이들의 희생’을 넘어 ‘가장 약한 존재의 침몰’이다. 철학아카데미 대표 김진영 선생은 애도의 정의를 바로잡고 죽은 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한겨레 박승화 이 인터뷰의 모티프는 영화 (2007)이다. 유괴 뒤 살해된 어린 아들을 화장장 불길 속으로 떠나보내는 신애는 대성통곡하는 아이 ..
하이브리드 십자가 전쟁 ‘하이브리드’는 미래학자들이 단골로 입에 올리는 개념이지만, 한국에서의 실상은 미래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과거로 퇴행하는 이들의 활용 양상이 도드라진다. 현대자동차 쏘나타 하이브리드의 기술력은 “북한 인권 외면하고 동성애 옹호하는 인권위 해체하라”고 외치는 ‘애국 기독교’ 단체들의 하이브리드한 명제 만들기 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장에서 성소수자를 향해 “당신, 세월호 주체지?”라고 4차원 공격을 가하는 것도 하이브리드한 저들이기에 가능하다. 그러니 ‘북한 인권과 동성애’, ‘세월호 참사와 성소수자 인권’의 함수관계에 합리성의 잣대를 갖다 대봐야 영화 를 뉴턴의 고전 물리학으로 접근하는 것만큼이나 요령부득이다. 저들의 담론은 논리 영역의 외부에서 구성된다. 그렇다고 저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