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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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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이라는 취재방법론 사칭하고, 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훔치는 일은, 고백하건대 언론판의 무용담거리다, 라고 나는 2005년 12월에 썼다. 이른바 황우석 사태 때다. 문화방송 이 취재원을 을러서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는 주장이 제기돼 급기야 프로그램이 중단된 직후였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적어도 저널리즘에 있어서는 논쟁적이다. 공권력이 아닌 언론이 꼭꼭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면 다양한 수단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공익을 위하는 목적이 확고하고 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논쟁적일 수 없다. 당시 언론들은 도덕군자 행세를 했다.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을 사정없이 질타하던 그 순간에도, 그들 자신은 사칭하고 으르고 협박하고 거래하고 훔치는 행위를 중..
‘피디 저널리즘’ 얕보는 ‘기자 저널리즘’께 그 차별과 배제의 인식론이 갈수록 초라해지는 현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기자 저널리즘’과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개념 구분이 있다. 구분이란 비교를 거쳐 그 차이점을 도출한 뒤 카테고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텐데, 나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기자가 하면 기자 저널리즘이고 피디가 하면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정도라면 굳이 구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짐작가는 대목이 없진 않다. 이런 구분은 기자 저널리즘은 ‘기록’을, 피디 저널리즘은 ‘연출’을 중시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경향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다. 신문 기사나 방송 리포트는 분량이 짧다보니 사실관계만 압축해 전하는 기법이 발달했다. 이에 견줘 방송 시사 프로..
버거킹 보증서 흔들며 과학을 외치다! [분석]동아일보 4일치 1면 기사의 ‘주술적 과학주의’를 비판함 미디어스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올해 고인이 된 김병관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은 지난 2001년 부인 안경희씨를 먼저 떠나보냈다. 하필 당국의 고강도 세무조사로 거액의 탈루 사실이 드러나 신문도 집안도 모두 큰 위기에 놓여 있을 때였다. 안씨는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해에는 신경쇠약 증세도 심했다고 했다. 다음날 동아일보 지면은 안씨의 죽음을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차분하게 다뤘다. 흥분한 쪽은 이웃 조선일보였다. ‘권력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거였다. 동아일보의 감각은 안씨의 죽음 자체보다 조선일보의 자극에 훨씬 민감한 듯 보였다. 그 다음날 느닷없이 1면 통사설(상자 전체..
PD수첩 '까는' 조중동 문법으로 조중동을 까보면… 저널리즘 준칙 참칭…‘왜곡’ 주장하는 진짜 왜곡 안영춘 기자 jona01@mediaus.co.kr 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토드 기틀린의 책 에는 저자가 방송과 인터뷰를 한 뒤 큰 곤욕을 치른 에피소드가 나온다. 방송 문법에 누구보다 빠삭하고 비판적인 그였지만, 이라크 침략 전쟁과 관련해 밝힌 ‘반전’ 입장이 ‘전쟁 불가피론’으로 오해사기 딱 좋게 보도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는 방송과 더러 인터뷰할 때면 인터뷰어에게 꼭 이렇게 묻는다. “(내 얘기를) 몇 초나 쓸 겁니까?” 시계 초침을 보며 말을 가다듬은 다음, 할 말만 주어진 시간 안에 딱 하고 끝내버린다. 방송의 문법은 영상과 내레이션의 상호작용에 관한 경험적 규범이다. 방송의 메시지란 이들 두 핵심요소가 수용자의 인지감각을 거쳐 빚어낸 ‘이..
진달래와 배아줄기세포의 관계 황우석 교수 연구실로 가는 계단과 복도 바닥을 따라 깔린 진달래 꽃길은 디엔에이 분자구조처럼 가지런했다. 가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갈 사람은, 바로 그 연구실의 주인일 터이다. 그 꽃을 늘어놓은 이들은 자신의 심정처럼 시인 김소월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믿었을지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김소월 시가 누구에게 바치는 애가인지 알지 못한다. 국어 교과서 싯구 아래 빨간 펜으로 밑줄 긋고 ‘조국’ ‘민족’이라고 썼던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그건 학력고사용 해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 해석은 적어도 객관식은 아니다. 시를 현실의 무대 위에 퍼포먼스로 재현한 ‘아이 러브 황우석’ 회원들의 해석이 사지선다의 특정 번호에 가지런이 몰려 있지 않기를, 우리 문학교육의 실패가 그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