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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지기 신소1의 결혼에 부쳐 2023년 7월8일 신소1 결혼식에서 읽은 편지입니다. 실제로 읽었을 때는 슬랩스틱 신파 장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생애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비의 소녀 1호, 줄여서 신소1에게 너한테서 결혼할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때, 뛸 듯이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네가 그 선택으로 인해 지금 행복하고 또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면 족하다고 여기려 했다. 아빠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할 터였다. 그렇지 못했다. 컴컴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에 빠져들고는 했다. 이 편지는 네 결혼을 앞두고 아빠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태를 해석하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다. 뙤약볕에 오래 졸인 바닷물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시나브로 소금이 오듯이, 아빠는 이제야 겨우 쓰기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100년의 쿰쿰함 이름부터 쿰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29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의 회담 기록이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내용이다. 그 뒤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시아의 만주와 조선 철수 및 사할린 남부 일본 할양)과 11월17일 을사늑약이 잇따라 체결됐다. 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관한 가장 건조한 기술이다. 내막은 간단하지 않다. ‘밀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정식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탓이다. 문건은 1924년 미국의 역사가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발견’됐다. 심지어 ‘비밀’이라 단정하기도 모호하다. 일본의 이 이미 1905년 10월 관련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보도가 나오자 미국 정부가 펄쩍 뛰었..
‘내로남불’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을 두고 한동안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피의사실을 육하원칙에 따라 삼엄하게 기술해야 하는 문서의 성격과 위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검찰이 잘 알았을 테고, 그런데도 굳이 그걸 사용한 의도쯤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어와 영어의 혼종으로 그럴듯한 사자성어 꼴을 갖춘 이 신조어의 거침없는 번식력에 정작 눈길을 빼앗겨, 이러다가는 머잖아 헌법 조문에도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열없는 상상까지 하고 말았다. ‘내로남불’은 1996년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본인 주장이지만, 사실이라면 일단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성싶다. 일회성 유행을 넘어 언..
파업 손배소 ‘지옥’의 발명가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자, 대기업을 상대로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365일 돌아가며 파업을 벌일 거라는 따위의 망상적 예언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묵시록은 외줄타기나 다름없는 합법파업에서 한발짝만 삐끗해도 파업 노동자를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현행 체계가 불과 30년 전 어름에 만들어진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1989년 8월1일, 대구의 자동차부품회사 ㈜건화. 회사가 말 한마디 없이 상여금을 깎자 노조는 긴급 총회를 열어 해명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루 작업이 중단됐다. 이튿날 회사는 불법파업을 했다며 위원장 등 2명을 해고했다. 이에 노조가 반발해 일주일간 조업 차질이 빚어지자, 이번엔 해고자 2명에게 179..
두 아비, 가만한 슬픔과 전략적 표정 사진은 정적이다. 재난 보도 사진으로는 드문 경우다. 바닷가에서 엎드린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의 사진 이후 처음인 듯하다. 튀르키예 대지진의 폐허 한가운데, 무너져 앉은 아버지의 몸가짐과 표정은 가만해 보인다. 그의 왼손이 붙든 또 하나의 창백한 왼손은 잔해 더미에 가린 열다섯살 딸의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간 지 이미 오래임을 일러준다. 사진은 그 하염없는 시간을 순간으로 포착함으로써, 자신의 숨결을 피붙이에게 불어넣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슬픔의 심연이 고요의 바다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고요함을 품고, 사진의 형상과 구도는 익숙한 이미지를 길어 올린다. 피에타다. 미켈란젤로가 평생에 걸쳐 제작한 마리아와 예수의 4연작과 케테 콜비츠가 자신과 전사한 둘째 아들을 ..
초국적 ‘오염 엘리트’에게 탄소세를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이끄는 ‘세계불평등연구소’에서 얼마 전 ‘기후불평등보고서 2023’을 발표했다. 유엔의 지원까지 받은 방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보고서의 절반은 수식(數式)이다. 연구자들이 망연한 수의 바다를 건너가 확인한 중대한 사실은, 전세계 ‘탄소 불평등’에서 국가 내의 탄소 불평등이 차지하는 비율(64%)이 국가 간의 탄소 불평등보다 2배 가까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개최된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의 주요 의제가 기후위기로 인한 개발도상국의 피해 보상 문제였던 것만 봐도, 이번 보고서가 기존 인식을 뒤집는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피케티가 에서 방대한 통계를 분석해 경제학의 많은 정설을 부정했듯이. 실제로 2019년과 1990년의..
전시 성폭력, 가해자의 시선을 넘어 ‘존 마크 램자이어’라는 이름이 아주 눈에 설지는 않아 뒤적여봤다. ‘일본 판사들의 승진에 대한 열망이 정치적 판결을 내리게 만드는 통로’라는 그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 칼럼(최한수,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2020년 12월 28일)에서 스친 이름이었다. 칼럼을 읽고 나서 제법 공감 가는 분석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 램자이어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고, 정작 논문의 근거인 ‘매춘 계약서’는 본 적조차 없노라고 뒤늦게 실토했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일본 판사 사회 분석에 대해서도 신뢰를 접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난감했다. 램자이어 교수의 위안부 논문이 세계 지성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던 삼일절, ‘한국은 베트남에서의 ..
부치지 못한 편지-김만배 돈거래 사건에 부쳐 편집국 고위간부의 김만배 돈거래 사건으로 신문사 내부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고심을 거듭해 쓴 글인데, 끝내 발표하지 못했다. 일기처럼 기록으로 남긴다. 논설위원실에서 일하는 안영춘입니다. 엄혹한 시기에 동료 여러분께 글을 띄웁니다. 제가 대단한 탁견이나 평정심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저도 서글프고 두렵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고 눈앞이 아득합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말길을 열려고 먼저 나서지 않으면 이 무겁고 단단한 침묵의 결계가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실명으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제 글에 바이라인을 붙이면서 이 글만 예외로 할 명분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비판이면 모를까, 말 걸기이자 나름 참회록이기도 한 글이 익명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악몽이어도 좋으니 부디 꿈이기만 했으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