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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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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도수제와 ‘용건만 간단히’ ‘전화 도수제’는 발신 통화 횟수에 따라 요금을 매기는 제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외전화를 하려고 우체국에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통화가 끝나면 창구 직원이 몇 도수가 나왔다고 일러주고 요금을 받았다. 지금도 도수제는 공중전화에 골격이 남아 있다. 한번 전화를 걸 때마다 먼저 기본요금을 투입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끊어도 남은 시간 차액이 환불되지 않는다. 1896년 경복궁 내부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화 역사를 보면, 공중전화 말고도 몇차례 도수제가 도입돼 운영되고는 했다. 1937년 7월1일 경성국에서 가입자 5000명 이상인 지역에 한해 전화 사용료를 기본료와 도수료로 구분해 징수한 것이 첫 기록이다. 미군정 때인 1948년 6월1일 시행된 군정법령 제2036호는 1급지에 대해 ..
‘여가부 해체’와 ‘멸공’이 말하지 않은 것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말은 극단적으로 짧았다. ‘설화’를 줄이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 아닐까 짐작도 해봤다. 그러나 훨씬 강력한 쓸모는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이었다. 윤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의 뜻을 묻는 기자들에게 “뭐든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엉터리없는 동문서답이 아니다. 더는 묻지도, 답변을 기대하지도 말라는 거다. 그리하여 ‘여성가족부 폐지’는 설명 따위 필요 없는 암기과목의 단답형 정답이 됐다. 문제는 그 정답이 누구에게 제출됐는가다. 빨간펜은 ‘이대남’이 쥔 모양새다. 말이 잘려나간 자리는 ‘밈’(meme·인터넷에 퍼뜨리기 위해 연출한 이미지물)으로 채워졌다. 윤 후보가 멸치와 콩으로 몸소 시전했다. 밈의 순기능은 ‘풍자’다. 쓰..
신지예의 ‘정체성 정치’ “특정 종교, 민족, 사회적 배경 등을 가진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광범위한 기반의 정당정치에서 탈피해 배타적인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경향이다.” ‘정체성 정치’에 대해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사의 웹 사전 ‘렉시코’(Lexico)가 내린 정의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대표적 하위 범주인 ‘젠더’가 예시에서 빠져 있어 아쉽다. 대신 ‘배타적’이라는 표현을 써서, 정체성 정치가 빠질 우려가 있는 함정이 뭔지 암시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들에게 유력한 정치투쟁 수단이다. 이들은 기성 정치체제로는 대의되지 못하는 정체성을 억압의 경험을 통해 공유하고, 억압에 맞서 연대한다. 다만 두 개의 다른 정체성 사이에 오직 소수자라는 이유로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우리)의 고통은 오직 ..
조동연은 ‘피해자’에 미달하는가 “민주당 이재명 캠프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된 조동연 교수가 ‘사생활 논란’(홑따옴표 필자 첨가)으로 문제가 불거지자 어제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생활 논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거짓에 기초한 가정 구성이나 삶의 태도’(〃)는 성별을 떠나 문제가 있다.” 현실 정치권 안에서 젠더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가 지난 3일 발표한 입장문의 첫 단락이다. 나는 저 문장 앞에서 몇날 며칠 배회했다. 몇번을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입장문의 취지는 조동연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데 있었다. 셋째 단락부터 입장문의 문제의식은 확연해진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조동연 사태’(〃)의 원인을 조동연 개인이 아닌 민주당에서 찾는다. 흔히 정당은 문지기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세금, ‘폭탄’과 ‘구제’의 메타포 ‘종부세 폭탄’이라는 은유의 폭탄이 연쇄폭발하고 있다. 상위 2%만 고지서를 구경할 수 있다는 노블레스(고귀)한 세금이 전쟁이나 테러를 연상시키는 표현과 결합해 일으키는 위력은 대단하다. 최근 (YTN)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종부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긍정적 의견보다 13.9%포인트 높았다. 이런 여론 지형은 장기간 유지돼왔다. ‘유지+강화’ 의견이 52.3%로 높게 나타난 의 조사 결과(11월25~26일)가 여론 변화의 신호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세금 폭탄’은 우리 귀에 딱지가 앉은 표현이지만, 영어(‘tax bomb’)로 구글링해보면 의외로 희소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Falciani's Tax Bomb, 한국어 제목 ‘스위스 비밀계좌를 팝니다’) 정도다. 여기서 ‘세금 폭탄’은 ..
설계를 설계하라 ‘설계’는 대장동 사태의 열쇳말이다. 검찰 수사의 길잡이별이 ‘설계’임은 물론이다. 누가, 왜 수익 배분을 그렇게 설계했는지 사법적으로 특정하는 것이 검찰이 가려는 최종 목적지일 것이다. 인물로 치환하면 화천대유 3인방을 비롯한 토건-법조 카르텔을 경유한 뒤에야 나올 ‘윗선’일 것이다.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단을 가진 수사라고 단정하면 그 또한 섣부른 예단이다. 수사의 범주를 제한하다간 외려 성역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예단을 가진 수사와 성역 없는 수사는 기실 한끗 차이다. 문제는 의도성을 가진 수사인지 여부다. 그러할지 우려하는 시선과 그러하길 기대하는 시선 모두 탄탄한 경험칙에 근거하고 있다. 검찰은 그 우려와 기대 사이의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스스로 지은 업보..
‘종내 차별주의자’인 어느 반려인 ‘쾌고감수능력’(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동물권 운동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영어로는 ‘sentience’인데, 일반적으로 감각성이나 지각력을 가리키는 이 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가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다. 싱어는 (1975)에서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종에는 공리주의의 원리인 ‘이익평등고려원칙’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리주의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이익에 반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동물 할 것 없이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근대 휴머니즘이 정작 비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종 차별주의’나 다름없음을 일깨운다. 인간의 동물 단백질에 대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공장식 축산이 만연하고, 지적 호기심이나 질병..
이재용의 ‘판도라 상자’ ‘파나마’ ‘파라다이스’ ‘판도라’…. 로마자 머리글자가 ‘피’(P)인 것 말고 공통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셋 사이를 별자리마냥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했다. 국제탐사언론인협회(ICIJ)는 100여개국 기자 수백명이 협업해 탐사 취재와 보도를 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다. 우리나라에서는 가 참여하고 있다. 2013년부터 전세계 유명짜한 정치 지도자, 억만장자, 스타 등이 조세회피처에 자산을 빼돌리는 실태를 파헤쳐 보도하는 데 주력해왔다. 파나마 페이퍼스(2016년) 때부터 주요 탐사 프로젝트에 ‘페이퍼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파라다이스 페이퍼스(2017년)와 판도라 페이퍼스(2021년)가 뒤를 이었다. ‘페이퍼스’는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스’를 가 폭로한 것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