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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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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 100년의 쿰쿰함 이름부터 쿰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29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의 회담 기록이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내용이다. 그 뒤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시아의 만주와 조선 철수 및 사할린 남부 일본 할양)과 11월17일 을사늑약이 잇따라 체결됐다. 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관한 가장 건조한 기술이다. 내막은 간단하지 않다. ‘밀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정식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탓이다. 문건은 1924년 미국의 역사가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발견’됐다. 심지어 ‘비밀’이라 단정하기도 모호하다. 일본의 이 이미 1905년 10월 관련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보도가 나오자 미국 정부가 펄쩍 뛰었..
‘내로남불’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을 두고 한동안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피의사실을 육하원칙에 따라 삼엄하게 기술해야 하는 문서의 성격과 위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검찰이 잘 알았을 테고, 그런데도 굳이 그걸 사용한 의도쯤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어와 영어의 혼종으로 그럴듯한 사자성어 꼴을 갖춘 이 신조어의 거침없는 번식력에 정작 눈길을 빼앗겨, 이러다가는 머잖아 헌법 조문에도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열없는 상상까지 하고 말았다. ‘내로남불’은 1996년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본인 주장이지만, 사실이라면 일단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성싶다. 일회성 유행을 넘어 언..
파업 손배소 ‘지옥’의 발명가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자, 대기업을 상대로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365일 돌아가며 파업을 벌일 거라는 따위의 망상적 예언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묵시록은 외줄타기나 다름없는 합법파업에서 한발짝만 삐끗해도 파업 노동자를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현행 체계가 불과 30년 전 어름에 만들어진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1989년 8월1일, 대구의 자동차부품회사 ㈜건화. 회사가 말 한마디 없이 상여금을 깎자 노조는 긴급 총회를 열어 해명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루 작업이 중단됐다. 이튿날 회사는 불법파업을 했다며 위원장 등 2명을 해고했다. 이에 노조가 반발해 일주일간 조업 차질이 빚어지자, 이번엔 해고자 2명에게 179..
두 아비, 가만한 슬픔과 전략적 표정 사진은 정적이다. 재난 보도 사진으로는 드문 경우다. 바닷가에서 엎드린 자세로 숨진 채 발견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의 사진 이후 처음인 듯하다. 튀르키예 대지진의 폐허 한가운데, 무너져 앉은 아버지의 몸가짐과 표정은 가만해 보인다. 그의 왼손이 붙든 또 하나의 창백한 왼손은 잔해 더미에 가린 열다섯살 딸의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간 지 이미 오래임을 일러준다. 사진은 그 하염없는 시간을 순간으로 포착함으로써, 자신의 숨결을 피붙이에게 불어넣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슬픔의 심연이 고요의 바다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고요함을 품고, 사진의 형상과 구도는 익숙한 이미지를 길어 올린다. 피에타다. 미켈란젤로가 평생에 걸쳐 제작한 마리아와 예수의 4연작과 케테 콜비츠가 자신과 전사한 둘째 아들을 ..
초국적 ‘오염 엘리트’에게 탄소세를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이끄는 ‘세계불평등연구소’에서 얼마 전 ‘기후불평등보고서 2023’을 발표했다. 유엔의 지원까지 받은 방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보고서의 절반은 수식(數式)이다. 연구자들이 망연한 수의 바다를 건너가 확인한 중대한 사실은, 전세계 ‘탄소 불평등’에서 국가 내의 탄소 불평등이 차지하는 비율(64%)이 국가 간의 탄소 불평등보다 2배 가까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개최된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의 주요 의제가 기후위기로 인한 개발도상국의 피해 보상 문제였던 것만 봐도, 이번 보고서가 기존 인식을 뒤집는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피케티가 에서 방대한 통계를 분석해 경제학의 많은 정설을 부정했듯이. 실제로 2019년과 1990년의..
전시 성폭력, 가해자의 시선을 넘어 ‘존 마크 램자이어’라는 이름이 아주 눈에 설지는 않아 뒤적여봤다. ‘일본 판사들의 승진에 대한 열망이 정치적 판결을 내리게 만드는 통로’라는 그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 칼럼(최한수,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2020년 12월 28일)에서 스친 이름이었다. 칼럼을 읽고 나서 제법 공감 가는 분석이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 램자이어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고, 정작 논문의 근거인 ‘매춘 계약서’는 본 적조차 없노라고 뒤늦게 실토했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일본 판사 사회 분석에 대해서도 신뢰를 접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난감했다. 램자이어 교수의 위안부 논문이 세계 지성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던 삼일절, ‘한국은 베트남에서의 ..
이것은 ‘팃포탯’이 아니다 ‘팃포탯’(tit for tat)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용어가 아니어서인지 이런저런 비유가 많이 등장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대표적이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원조인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의 대원칙이다. 실제로 이 법전에는 “평민이 귀족의 눈을 멀게 했으면 제 눈을 멀게 한다”(196조), “평민이 귀족의 뼈를 부러뜨렸으면 제 뼈를 부러뜨린다”(197조) 같은 조문이 여럿 나온다. 그러나 팃포탯의 뉘앙스와 더 잘 어울리는 건 마오쩌둥이 남긴 이 말이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오로지 죄와 벌에 관한 것이지만, 마오의 저 말은 상대방을 대하는 원칙이나 태도·방식과 관련돼 있다. 평화도 가능..
연평도 보온병의 추억과 윤 대통령의 무지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4분 북에서 쏜 포탄 수십발이 연평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은 하굣길이었고, 어린이집 원생들은 낮잠 시간이었다. 바닷가에서는 주민들이 굴을 따고 있었다. 교전은 1시간 남짓 이어졌다. 우리 쪽은 민간인 2명과 군인 2명이 숨졌다. 주민 80%가 여객선과 어선에 몸만 싣고 피난길에 올랐다. 민간 거주지역이 공격당하는 사태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래 처음이었다. 이튿날 입도한 한나라당의 안상수 대표는 폐허가 된 주택가에서 검게 그을린 원통형 물체 2개를 손에 들고 섰다. “이게 포탄입니다, 포탄!” 예비역 육군 중장인 황진하 의원은 포병여단장 출신답게 “이게 76㎜ 같고, 이거는 아마 122㎜ 방사포”라며 아는 체했고, 공군 중위로 전역한 안형환 대변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