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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노키즈존’에 대한 아재의 위치성

‘노키즈존’을 내건 레스토랑이나 카페, 심지어 펜션까지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논란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나서였는데, 이 금단의 구역은 이미 몇해 전부터 도처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왁자한 술집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 늦은 퇴근길 동선에서는 좀체 조우할 만한 기회가 없다는 점을 들어, 나는 기자로서 때늦은 정보 습득의 잘못을 스스로 사면했다. ‘사업주의 정당한 권리’니 ‘맘혐’(엄마 혐오)이니, 주고받는 자못 심각한 설전이 과잉논쟁으로 보인 탓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도 특정한 공통점이 있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곳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 거덜 나는 걸 막으려고 고기뷔페 주인이 내걸었던 ‘씨름 선수단 사절’ 글귀는 그 집단에 대한 적대가 아닌 우스개였다. 한때 여러 시민단체의 출입문엔 ‘개, 기관원, ○○일보 기자 출입금지’ 글귀가 나붙었는데, 동물권에 대한 평균 눈높이가 지금과 크게 달랐던 시절, 나름의 감수성과 위트로 문제의식을 풀어낸 시대적 삽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색하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도 그땐 없었다.

처음엔 노키즈존의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여겼다. 20세기의 고기뷔페 주인이 21세기의 레스토랑 주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러나 노키즈존 가운데 ‘개는 들어가도 아이는 못 들어가는’ 곳까지 있다는 걸 알고 나자, 나는 생급스러운 인본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 십수년간 개의 위상이 올라가는 사이에 사람의 위상은 거꾸로 추락한 것 아닐까. 기사에 붙은 댓글 중에는 본문에 나오는 어느 업주가 장애 유기견을 거둬 기르는 ‘착한 사람’이라며 노키즈존을 두둔하는 내용도 있었다.

“아이가 개보다 못하냐?” 하지만 뇌리를 스친 이 성난 질문은 본질을 비켜 간다. 아이의 인격은 고유하고 독립적이다. 상대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가치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유기견을 입양한 레스토랑 주인도 둘 사이의 우열엔 관심조차 없었을 터이다. 많은 고객의 요청, 공간의 협소함, 업소의 콘셉트나 마케팅 전략 등등. 노키즈존을 설정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그 안에 ‘아이’와 ‘보호자’라는 정체성을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노키즈존은 공간을 통한 배제의 장치일 뿐이다.

노키즈존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감응이 일어나려는 즈음, 이번엔 코 후비다 뒤통수를 가격당한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노키즈존이 늘면서 에스엔에스에서 ‘#서비스직이_말하는_진상아재’ 해시태그가 확산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폭력성이야 마초 중년 남성을 따를 자가 없을 테지만, 노키즈존의 불똥이 왜 가만있는 아재에게 튀는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퇴근 뒤 내 동선에서 보듯이, 아재들은 고성방가의 주범일지언정 노키즈존의 고객일 가능성은 극히 낮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아재가 노키즈존 갈등의 국외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이 사태의 배후라는 유력한 방증이다. 노키즈존 갈등의 핵심적인 성격은 육아를 둘러싼 갈등이다. 노키즈존이 겨냥하는 타자는 다름 아닌 ‘맘충’이며, 맘충은 육아 전담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혐오 발화다. 우두머리 수사자가 사냥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먼저 배를 채우듯이, 가부장제의 최상위 포식자인 아재는 저 치열한 육아의 전쟁터에 출몰할 이유가 없다. 논리를 초과하는 이 진실의 은유를 대면하고서야,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지며 내게 내린 셀프 사면을 철회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