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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손석희’로 본 언론의 낯선 초상


손석희 앵커와 나 사이의 격차(차이가 아니다!)를 꼽으라고 하면 금세 백 가지도 넘게 댈 수 있겠지만, 이태 전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설명하고 남지 않을까 싶다.

 2015년 4월 어느 날, <제이티비시>(JTBC)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경향신문> 기자와 전화로 나눈 대화 목소리를 메인뉴스 시간을 통째로 털어 내보냈다. 날이 밝은 뒤 많은 사실이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지면에 대화 전문을 공개하려고 이미 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향신문>이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에게 분석을 맡긴 녹음파일을 <제이티비시>가 중간에서 입수했고, 유가족의 반대까지 무릅쓰며 ‘시간차 단독보도’를 감행했다. 손 앵커는 보도 다음날 같은 뉴스에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강조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는 알지 않아도 될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그 주 주말 편집국 당직을 서면서, 나는 수십 통의 항의전화에 시달렸다. 손 앵커의 행태를 꼬집은 한 외부 필자의 <한겨레> 토요판 글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한×× 너희나 똑바로 해”, “제이티비시가 잘나가니 배가 아프냐”…. 그러나 여태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건 더없이 애틋하고 곡진했던 한 목소리다.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끼리 싸워야 되겠습니까?” 어쩌다보니 <한겨레>와 <제이티비시>는 ‘우리’(같은 진영)가 되어 있었다.

 모든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손 앵커의 자리에 나를 끼워넣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맞닥뜨릴 운명은 그와 나를 도무지 ‘우리’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가혹할 것이 틀림없다. 손 앵커의 로맨스는 나의 불륜이다. 대한민국 언론계 종사자 모두를 ‘나머지’로 만드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은 그만의 깊은 철학과 탁월한 실력, 드높은 윤리성의 총합이겠으나, 저널리즘에서 ‘누가’가 ‘무엇을’을 압도해버리는 사태는 당혹스럽다. 생전 송건호, 리영희 선생 같은 언론인이라도 손 앵커처럼 ‘까방권’(까임방지권)을 발급받지는 못했을 터이다.

 2년 남짓 지난 최근 어느 날, 이번엔 손 앵커도 낯설어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뉴스를 마무리하는 클로징 코멘트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정치인으로서의 ‘타락’에 유감을 표시했다. 인간미를 품은 이지적 냉철함! 내 눈에 클로징 코멘트는 여느 때처럼 손석희다웠다. 성완종 녹음파일 보도와는 댈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부 누리꾼의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안철수를 두둔했다는 게 비난의 요지였다. 사실관계를 다 떠나, 2년 사이 무슨 심각한 상황 변화가 있었기에 까방권은 갑자기 소멸해버린 걸까.

 그의 까방권은 법인카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도 무제한의 법인카드를 쓰는 고위급 임원이 어느 날 명품가게 점원한테서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라는 얘기를 듣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 카드로 뭐든 다 할 수 있지만, 자기 소유는 아니어야 스토리의 개연성이 성립한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췄어도, 임원의 운명은 오너의 심기와 손끝에 달려 있다. 손 앵커의 까방권은 기한이 다한 게 아니라 단서조항이 추가된 건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거 뭐든 다 해. 단 하나만 빼고!”

 송건호, 리영희 선생과 달리 손 앵커가 까방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던 건 오늘날 언론인이 셀럽(셀러브리티)이자 팬덤 현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방증이다. 지금 저널리즘은 실재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미지의 영역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이미지의 영역은 ‘까’와 ‘빠’의 이분법 세계다. 이 세계에서 언론(인)은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탈 수밖에 없다. 손 앵커가 나와 ‘우리’의 관계인 단 하나의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