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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게이트, 대통령제가 낳은 스캔들

‘게이트의 계절’이 돌아왔다. 용(미르)이 등장하고 말(승마)이 등장하는 걸 보면 머잖아 12간지 동물이 총출동하는 설화 같은 현실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무협지처럼 허황하고 막장 사극처럼 봉건적인 요소로 가득 찬 구성은 보는 이의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픽션이었으면 훌륭한 희극이 되었을 이 스토리는, 그러나 논픽션인 바람에 비극이 되고 말 운명이다. 설령 결론이 권선징악이 되더라도 크게 희망적일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한들 게이트는 반드시 다시 도래하기 때문이다. 게이트는 결코 소멸하는 법 없이 주기적으로 회귀한다는 걸 우리는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한겨레 김태형 기자


게이트의 출현 주기는 5년이다. 5년은 대통령 임기와 관련이 깊다. 대체로 대통령 임기가 1~2년 남았을 때 게이트는 얼굴을 내민다. 그 이전까지의 시간은 땅속에서 변태를 꿈꾸는 매미의 시간과 같다. 오늘의 얼굴은 어제의 얼굴이 아니다. 대통령이 주연일 때도 있고 대통령의 혈연(들)이 주연일 때도 있다. 그들을 호가호위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는 직접 혈연관계가 없는 인물이지만, 호사가들은 그를 대통령의 오장육부에 빗댄다. 아예 신체의 일부라면 혈연 따위에 비할 바인가 싶다. 그러나 얼굴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더라도 끝내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게이트는 대통령이 있기에 비로소 싹튼다는 사실. 대통령은 모든 게이트의 출발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태 단 한 명의 대통령도 게이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게이트는 그/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징표인 셈이다. 이 ‘예외 없음’은 개별자로서 대통령을 넘어서 대통령제라는 제도에까지 의문을 던지게 한다. 대통령제에는 분명히 게이트 친화적인 면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지 않은가. 대통령이 없으면 게이트도 없는 것 아닐까.


게이트란 그냥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스캔들이다. 절대군주나 그 주변인물이 백성의 돈을 강탈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대통령제는 민주주의 제도로 간주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권력분산이다. 그런데 대통령제의 주요 특성은 권력집중이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제가 제왕적 대통령제여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견해는 부분적으로만 맞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대통령제는 정말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제도인가.


철학자 김상봉은 “대통령은 선출된 왕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의 원리도, 공화주의의 원리도 위배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리가 모두의 지배인데 반해, 출마하는 데 엄청난 자원이 필요한 대통령제는 차라리 과두정치에 가깝다. 공화주의의 경우, 형식에서 법치, 내용에서는 공공성이 핵심이다. 대통령이나 그 주변이 불법을 일삼고 권력으로 사익을 챙기면 공화주의를 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품성 좋은 대통령을 뽑는다고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음을 우리 대통령제의 역사는 입증한다.


역사로 보나 현실로 보나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제도다.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때가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다. 불과 200여 년 전이니 민주주의의 늦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시정부 시절엔 한 번도 대통령제인 적이 없었다. 선출 절차의 정당성이 확보된 대통령을 경험한 것도 1987년 6·10항쟁 이후부터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로 인정되는 국가 가운데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통령제를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고 여기고,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감각한다. 이 남루한 제도를 얻는 데에도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집단기억에 ‘신성’으로 기입되어 있는 탓은 아닐까. 하지만 그거야말로 이데올로기다. 그 이데올로기가 구축한 사회 구조의 회로를 타고 게이트는 끝없이 회귀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건 대통령제 자체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흥미진진한 게이트 정국이 가리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