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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욕실 청소, 그 특수함에 대하여

 

-5월8일, 참나무씨의 어떤 하루

 

가사노동에서의 평등은 다음 두 가지가 달성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성별분업의 폐지. 둘째, 일의 합리적인 분담.

성별분업이란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과 여성이 해서는 안 될 일을 금기로서 못 박은 것이다. 여기에 노동의 장소가 가부장제의 집 내부로 옮겨지면 다시 남성이 해서는 안 될 일로만 국한되는데, 그것은 애초 가사노동이 여성만의 ‘의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뭐든지 해야 하는 반면, 남성은 예외적으로 해주는 것이고, 내키지 않으면 그마저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별분업의 폐지는 (성)평등한 가사노동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성별분업이 폐지돼도 합리적인 분담이 이뤄지지 않으면 가사노동의 평등은 완성되지 않는다. 무엇이 합리적인 분담일까. 노동강도를 포함한 노동총량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해 사람 수로 나누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기계적인 평등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각자의 노동능력을 고려하지 않아 오히려 평등을 해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우려도 크다. 집 바깥에서의 노동, 건강상태 등도 반영할 때라야 비로소 합리적인 분담이고, 여기에 자발성과 배려까지 더해지면 가사노동은 평등을 넘어 해방의 가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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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씨가 이렇게 별 쓰잘데 없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집에 덩그마니 혼자 남겨진 5월8일 오전부터였다. 서비스업체 인턴사원인 큰딸은 “운 좋으면 저녁식사 함께 하자”는 말을 남기고 이른 아침 출근길에 나섰다. 고등학생인 작은딸은 며칠 전부터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갈 거라더니, 참나무씨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갔다. “어버이날인데 미안해”라고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잠결에 들은 것 같다. 부스스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먹으려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거리가 참나무씨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순간 울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이러다가는 고독사하고 말겠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의 참나무씨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감성적인 몰락의 위기에 처해도 반드시 이성적인 의지로 돌파하려고 하는 태도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스스로 안구건조증까지 의심해야 했던 그로서는, 이 상황에서도 애써 이론적 해석을 하려 드는 게 당연했다. ‘어버이날은 이미 어버이연합으로 인해 오염되고 말았다. 다만 나는 이날, 가사노동의 평등에 대해 끝까지 생각을 밀고 가봐야 하리라.’

 

참나무씨네의 가사노동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일반적 가사노동. 밥 짓고, 국 끓이고, 설거지하고, 청소기 밀고, 세탁기 돌리고, 빨래 널고 개는,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분야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참나무씨네는 성별분업을 해소했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의 경우 참나무씨는 된장국을 잘 끓이고, 큰딸은 김치볶음밥을 잘하며, 작은딸은 김밥과 떡볶이, 순대를 잘 ‘사온다’. 집에 같이 있을 때는 한 사람이 청소기를 밀면, 한 사람은 걸레질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먼지를 닦는다. 성별분업이 아니라 그냥 분업이다.

 

그러나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는 참나무씨네의 일반적 가사노동에도 이면이 있다. 바로 ‘인내심’ 겨루기다. 집 안 사물의 계통이 무너져가는 것을 누가 더 오래 견디느냐! 번번이 백기를 드는 건 참나무씨다.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먼저 가사노동을 제안하는 것도 대부분 참나무씨이지만, 다들 제가끔의 이유로 바깥 일에 바쁘다보니 그럴 기회조차 갈수록 줄어든다. 어쩌면 두 딸은 인내심이 강한 게 아니라 무신경이 심각한 건지도 모른다. “지혜네는 먼지가 뭉치로 굴러다녀.”(큰딸) “좀 더 비좁아지거든 하자.”(작은딸) 참나무씨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감독 나카시마 테쓰야·2006)의 도입부 장면(고독사한 마츠코의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원룸)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곤 한다. 그는 이날도 홀로 일반적 가사노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기계적인 평등이 목표가 아닌 다음에야 이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이다. 딸들과의 정치를 중단하지 않는 한 그 어떤 포기도 성급하다. 자발성과 배려의 노동해방은 끝내 오리라.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스틸컷

 

참나무씨네의 가사노동 가운데 일반적 가사노동 범주에서 제외되는 건 딱 하나, 욕실 청소다. 이것은 성별분업에서도 예외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노동의 수행 주체는 참나무씨뿐인데, 그가 이 집의 유일한 남성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참나무씨가 가정을 꾸리고 아직 큰딸이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때부터 그랬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욕실 청소는 일반적 가사노동에 포함시키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때는 가사노동의 평등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욕실 청소는 그냥 ‘남자가 할 일’이었다.

 

형광등은 여성도 갈 수 있지만, 욕실 청소는 여성의 힘으로 벅차다는 게 참나무씨의 오랜 지론이었다. 아직 실증된 바는 없다. 결혼한 여동생들에게 물어봐도 욕실 청소를 그녀들이 한다고 했다. 그녀들의 경우 일반적 가사노동에서도 평등과 거리가 멀어서, 그저 매제놈들이 괘씸할 뿐 딱히 참조할 만한 반증 사례는 아니라고 참나무씨는 일찍이 정리했다. 설령 가사노동에서 성별분업을 넘어섰더라도, 제대로 된 욕실 청소가 뭔지 모르는 자들이나 그 노동을 여성이 해도 된다고 여긴다. 도대체 참나무씨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욕실 청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령 참나무씨가 이날 욕실 청소를 위한 패션을 갖추고 거울 앞에서 떠올린 영화 <하녀>(감독 임상수·2010)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여자 주인공 전도연은 검정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욕조를 닦다가 남자 주인공 이정재와 눈이 마주치는데, 이것이야말로 임상수가 리얼리즘과 페미니즘을 빙자해 ‘오빠 믿지’ 판타지 영화만 줄창 만들어 왔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나무씨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욕실 청소를 하면서 그런 패션은 불가능하다. 이날 참나무씨의 패션은 평소대로 작은 팬티 한 장이 전부였다.

 

이 대목에서 대중문화가 신물 나게 그려온 이미지에 자동연상으로 사로잡히면 곤란하다. 야하기로 치면 <하녀> 전도연의 원피스 패션이 수천 배는 야하다. 하드보일드라면 모를까, 욕실 청소 같은 ‘특수 중노동’을 섹슈얼 판타지로 그린 임상수는 욕실 청소를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오빠임에 분명하다. 참나무씨의 욕실 청소 패션은 차라리 일본 스모 선수의 그것에 가깝다. “당신의 패션은 나의 피복이다”가 그의 패션관이지만, 욕실 청소 패션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기능성이 중시돼야 한다. 여성의 활동성을 모티프 삼았다는 샤넬의 옷도 욕실 청소에서는 귀족의 드레스일 뿐이다. 그런데 스모 선수 패션에는 기능성뿐 아니라 의식(儀式)의 요소도 담겨 있다. 참나무씨의 욕실 청소 패션도 그럴까. 

 

영화 ‘하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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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청소가 특수 중노동인 건 무엇보다 노동강도가 세기 때문이다. 참나무씨가 이런 패션을 선택한 것은 샤워기에서 튀는 물줄기 못지않게 몸속에서 솟구치는 땀방울로 범벅이 되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입은 것과 같다고 광고에서 떠들어대는 기능성 의류를 입는다 해도 욕실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육면체 내부 전체를 비누거품으로 닦다 보면 어느덧 온몸이 정체불명의 끈적한 수분에 뒤덮이고 만다. 물에 젖어 몸에 철썩 달라붙은 전도연의 영화 속 패션처럼 성적 코드가 될 수는 없다. 참나무씨는 기억한다. 한창 욕실 청소에 몰입한 상태에서 허리를 숙이는 순간 몸에 달라붙은 면바지의 엉덩이 부분에서 단말마처럼 부욱 하고 재봉선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던 때를.

 

물론 노동강도가 세다고만 해서 특수 중노동은 아니다. 욕실 청소는 그야말로 ‘특수한’ 중노동이다. 사용하는 근육은 어느 한 부위로 제한되지 않고, 순간순간 달라진다. 전신운동도 이런 전신운동은 없다. 천장을 닦으려고 까치발을 서면 팔 끝부터 발가락까지 스트레칭을 해야 하는데, 다리 장딴지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세면대 아래를 닦으려면 고슴도치처럼 바닥에 웅크린 채 고개를 외로 비틀어 위를 보아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양변기 뒤쪽을 닦으려면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고 한 팔을 최대한 멀리 뻗어 더듬거려야 한다.

 

가장 혹사당하는 부위가 따로 있기는 하다. 한쪽 팔이다. 오른손잡이인 참나무씨에게는 오른쪽 팔이 그렇다. 욕실 청소는 어느 동작에서든 단 한순간도 팔운동을 멈출 수 없다. 물때와 곰팡이가 끼는 곳은 넓고 평평한 면이 절대 아니다. 타일과 타일 사이를 이어붙이는 좁은 모르타르 도랑이다. 벽과 바닥의 타일 도랑은 가로 세로 줄잡아 수십개다. 그 틈바구니에 눌어붙은 때를 닦아내려면 곰팡이 제거제를 칙칙 뿌린 뒤 솔을 쥐고 최소 30차례 이상 피스톤처럼 팔을 뻗고 당겨야 한다. 물론 도랑 하나당 그렇다. 경우에 따라 횟수는 더 늘기도 한다. 그 모든 동작이 비누거품으로 덮여 빙판만큼이나 미끄러운 타일 바닥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상상해보라.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 저리 가라다.

 

그러나 욕실 청소가 특수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공간의 특수성과 깊이 닿아 있다. 욕실 문을 열면 천장과 벽, 바닥을 지탱하는 12개의 선으로 구성된 좁은 육면체의 공간이 대기하고 있다. 천장은 낮다. 창문은 없다. 공간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타일의 질감은 이물스러울 만큼 매끄럽다. 타일보다 더 매끄러운 거울이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거울은 폐쇄된 공간의 형상을 대칭으로 반사하며 비현실적인 개방감을 준다. 벽에 붙은 전등에서 나오는 불빛은 무대를 비추는 조명과도 같다. 말하자면 이 공간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참나무씨는 그곳에서 자신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페르소나와 대면하게 된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이라도 참나무씨의 욕실 청소에 유별난 구석이 있다는 걸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그가 설파하는 욕실 청소의 특수함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이 공간 안에서 노동을 하는 동안 자신의 행위에 점점 깊이 빠져든다. 육체는 고되지만, 스스로도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몸동작을 수행하면서 차츰 목표가 뚜렷해져가는 걸 느낀다. ‘여기서 밥알을 흘리면 주워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 아직은 실감할 수 없다. 공간은 깨끗해지기는커녕 잿빛의 물 얼룩만 더욱 번져간다. 그러나 마침내 샤워기를 틀어 육면체의 모든 면에 맑은 물을 뿌리면 순식간에 찬란한 빛이 탄생할 것을 그는 아는 것이다. 드디어 그가 타일인지 타일이 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무아지경의 상태로 진입한다. 그 순간 참나무씨의 최소주의 기능성 패션에는 강한 의식의 성격이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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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씨는 비로소 제 몸을 씻기 시작한다. 그 어느 때보다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고 나서 시계를 보니, 늘 그렇듯 2시간이 지나 있다. 그는 마치 2시간짜리 무대 공연을 마친 배우처럼 탈진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욕실 청소를 한번 하려면 그때마다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하는 이유가. 특수한 패션을 갖추고 욕실 문을 열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히는 이유도. 참나무씨에게 욕실 청소는 소외된 분업노동 형태가 등장하기 전의 신실한 장인노동이거나, 심지어 자신만의 분장을 하고 펼치는 일인극 행위예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 성별분업은커녕 분업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아니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줄 거라고 믿으며 단독노동을 신실하게, 몰입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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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가 넘어 두 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가했다.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다. 그때마다 탄성이 터져나온다. “우와, 청소했네!” “완전 반짝반짝!”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 그 빛나던 욕실은 반쪽짜리 가면의 유령이 숨어 사는 오페라극장처럼 다시 퇴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머리카락은 바닥에 실타래처럼 엉켜 뒹굴 터이다. 어떠랴. 누군가는 찰나를 위해 기꺼이 얼음 조각도 하지 않던가. 참나무씨는 다만 그날이 어버이날이었던 만큼, 두 딸에게 일반적 가사노동 분담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정치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