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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학벌 불능 시대의 역설

내가 일하는 신문사는 창간 초기에 서울대 출신 비율이 절반을 넘어, 대한민국 어느 조직보다 쏠림 현상이 심했다. 출신대학을 보지 않고 오직 필기시험으로만 뽑은 결과라는 것이 심각한 아이러니였다. 그러다 여러 종류의 글쓰기와 토론, 면접 등을 입사 전형에 도입한 뒤로 신입기자들의 서울대 출신 비율은 차츰 낮아졌고, 창간 15년이 지날 즈음에는 N분의 1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서울대 출신 비율이 줄어든 것을 두고, 어느 선배가 술자리에서 내뱉은 짙은 탄식이 기억난다. “이렇게 수준이 떨어지니 앞으로 큰일이다.” 내가 그 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도 전혀 괘념치 않은 건 서울대 독점은 조직의 수준과 정비례한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벌 기득권자들이 자원독점에 대한 자기합리화마저 해체하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다시 십수 년이 흐르고, 얼마 전 ‘학벌없는사회’라는 단체가 18년 활동을 접고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산 선언문은 한껏 비감하게 읽혔다. “2016년 봄, 우리는 여전히 학벌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양상이 변했다. 노동 자체가 해체되어가는 불안은 같은 학벌이라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조차 소멸시켰다. 학벌은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본문 재구성)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학벌은 해체되지 못하고 다만 무기력해졌는데, 자본주의의 위기에 따른 일자리 축소가 그 원인이라는 진단은 변화의 현상뿐 아니라 맥락까지 나름 정교하게 짚은 듯했다. 지난해 2월 연세대 졸업식에 “연대 나오면 뭐하냐. 백순데…”라는 현수막이 나붙었을 때, 언론들은 ‘취업절벽’에 대한 청년 세대의 절규라고만 풀이했다. 적어도 해산 선언문은 저 탄식 속에 해체되지 않고 남은 ‘마음 속 학벌’까지 놓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학벌없는사회’의 인식에도 나이브한 면은 있다. 학벌이 더는 배타적인 자원 구실을 못하는지부터, 이른바 ‘지잡대’ 같은 학벌 소외집단의 처지에서 새삼 따져볼 문제다. 더 큰 문제는 학벌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이 아무리 연줄사회고, 3대 연줄(학연, 혈연, 지연) 가운데서도 학연이 으뜸이라 해도, 학벌이 자본에게 밀려 위상과 기능이 쇠락했다고 보는 것은 전제가 잘못 되었다.

학벌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권력의 잔여다. 자본의 회로 안에서만 작동했다. 이명박 사원을 최고경영자로 만든 건 학벌 카르텔이 아니라 통천송전소학교가 정규 학력의 전부인 왕회장이었다. 또한 학벌 안에서도 계급은 애초 나뉘어 있었다. 과거 같으면 동문이었을 학벌 내부 상위계급은 이제 글로벌 학벌체제를 구축해 더욱 특권화된 반면, 하위계급은 떡고물마저 줄어 조선시대 몰락양반 처지가 됐을 뿐이다.

‘학벌없는사회’가 지향했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학벌로 상징되는 특권과 반칙이 사라지고, 누구나 능력대로 평가받는 사회? 그 정도의 윤리감정은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닮은꼴이다. 인문학자 서동진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논한 대로, 투명성과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새로운 합리성’의 지표다. 학벌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끝없이 스펙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단, 금수저만 빼고.

물론, ‘학벌없는사회’가 표방했던 사회가 그런 사회일 리는 없다. ‘연줄’은 쓸모없어지고 ‘연대’가 사회적 원리로 깊이 뿌리내린 사회, 내가 아는 이 단체의 지향이었다. 그러나 연줄은 느슨해졌지만 연대의 원리는 오지 않은 채 절대다수가 파편처럼 흩어져버린 모습이 현재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지금 ‘학벌없는사회’에게 요구되는 건 해산이 아니라 변신인지 모른다. 부정이 아닌 긍정, 해체가 아닌 구성의 어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