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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아빠를‘아빠’라 부르지 말아다오~


나와 딸들 사이에 오가는 언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챈 건 3년 전 이맘때였다. 소설 쓰는 손아람, 둘쨋딸 신소2(신비의 소녀2)와 셋이서 당일치기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손아람이 말했다. “형네는 참 특이해요.” 식구끼리는 좀체 쓰지 않는 “고마워”와 “미안해”를 일삼아 쓰더라는 거였다. 우리가 그랬던가.

그렇다고 나와 두 딸이 유별나게 내외하는 처지는 아니다. ‘불가근 불가원’이라면 모를까. 신소1(큰딸), 신소2는 나와 합의를 거쳐 얼마 전부터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 “아빠! 아차, 영춘!” 아직은 서툴지만, 곧 입에 붙으리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이 의지적인 행동의 뿌리는 다름 아닌 식구끼리도 서로 민감하게 배려하는 몸에 밴 감수성일 테니까. 그녀들이 “영춘, 미안!” “영춘, 고마워!”를 일삼을 날도 머잖았다. ‘곁’이란 ‘거리 없는 위아래’가 아니라 ‘거리를 확보한 나란히’라고 나는 믿는다.

개인의 언어 특성은 타고나는 부분도 크지 싶다. 신소2는 말이 무척 느린데, 가만 보면 하나하나 뜻을 짚어 입 밖으로 내느라 그러는 것 같다.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다. 1학년 때와 달리 그림일기를 쓰지 않기에 이유를 물었다. 진양조장단으로 답이 왔다. “요즘 참 좋은 일이 없어서.” 검사받기 위한 글은 쓰기 싫다는 뜻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한 셈인데, 그렇게 하라고 달리 가르친 적은 없다. 같은 환경에서 말을 배웠지만 신소1의 말이 훨씬 빠른 것을 봐도 언어는 분명 선천적인 데가 있다.

신소2의 경로화되지 않은 언어는 언뜻 엉뚱해 보이는 조합을 낳기도 한다. 달포 전쯤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개수대에서 발을 씻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식기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씻고 있어.” 내가 그 말에서 사물에 대한 놀라운 감수성을 읽어낸 것이 핏줄의 이끌림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그녀의 고유한 언어 조합이 늘 문어체라고 타박을 받는 내 말투와 발가락만큼 닮은 것 같아 핏줄이 팽팽하게 당기는 느낌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내가 말을 받았다. “식기도 그렇게 생각할까?”

신소1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제 밥벌이를 하지만, 고등학생인 신소2에게는 용돈을 준다. 필요할 때 쓰라고 신용카드도 맡겨뒀다. 신소2는 카드 쓸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걸어 용처를 밝힌다. “화장품 사러 왔는데, 색조 화장품은 내 용돈으로 사겠지만 기초 화장품은 영춘 카드로 살게. 기초 화장품은 양육비에 포함시키는 게 맞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색조 화장품도 카드로 사라고 했다. “색조 화장품 값은 ‘효행 부금’이야. 잊지 마. 영춘 팔다리에 힘 빠지면 신소들한테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살 테니까.”

우리 식구의 이런 대화에서 교육적 효과를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교육 강박증이다. 중·고교 시절 신소1은 학교 가기 싫은 날이면 “선생님께 나 아프다고 전화 좀 해줘”라며 내게 거짓말을 시키곤 했다. 1학기 중간고사 시작 첫날, 신소2는 아침 8시가 다 돼 잠에서 깨어 천연스럽게 말했다. “잠을 충분히 잤더니 뿌듯하다.” 그래도 스스로 세상과 밀고 당길 줄 아는 그녀들이 믿음직한 건 사실이다. 손아람! 약속대로 우리 식구 이야기로 소설 써주는 거지?

* <한겨레21>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