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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글

“처사님, 글로 성불하세요”

봄날, 법랍 17년 비구니 누님과 나눈 공부·수행 이야기  



먼발치로 봐도 낯빛이 환하다. 하기야, 화창한 4월 초 오후 2시 만개한 벚꽃 아래 아닌가. 아니면 몇 해 만에 만나는 혈육이 반가워서일까.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장삼 자락 팔랑이며 작고 다부진 몸피의 비구니가 재게 다가온다. 파안대소로 드러난 큰 앞니에 봄 햇살이 튕겨 자잘하게 부서진다. 한발치 떨어져서 서로 합장하는데, 산보 나온 이들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순간 표정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럴 수밖에. 그녀가 대학생이고 내가 고3일 때, 제주도 여행을 떠난 부모 대신 학부모 상담을 하러 학교 언덕길을 오르는 그녀를 교실 창가의 급우가 발견하고는 이렇게 외쳤다. “야, 저기 여자 안영춘이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처사님. 속가로 만행 왔는데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다른 주말여행 일정을 미루고 전주행 버스를 탔다. 출가 뒤 단 한 번도 속가를 찾은 적이 없었다. 환속이라도 하려는 건가. “환속이요? 글쎄. 내가 법랍 17년인데, 수덕사 견성암에서 행자할 때, 동학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그렇게 두 번 환속을 생각한 적은 있지요. 절집에서도 바깥과 다를 바 없이 사람 사이에 질투나 갈등 같은 걸 겪다보니 이럴 거면 중으로 살 필요 있나,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거지요. 그조차 다 과정이더라고. 출가 당시부터 때가 되면 언제든 환속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부모님 집에 들어 늦은 점심상을 차렸다. 냉장고 안에는 막걸리도 한 통 있었다. 출가 직전에도 늦도록 나와 말술을 들던 그녀였으나, 내가 알기로 출가 뒤로 한 번도 파계한 적은 없었다. “이젠 조금씩 할 때도 있어요. 은사 스님께서 때론 곡차도 정진의 한 수단이라고 하셨고….”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몇 해 전 마지막 봤을 때 수행생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도 났다. 막걸리 가득 채운 술잔을 서로 부딪쳤다. 한 호흡에 양껏 들이켠 다음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갓김치를 집어 들다 말고 그녀가 말했다. “환속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즈음 절망이 바닥을 쳤지요.”

 

*

 


스님과의 계곡 나들이.

출가 뒤로 줄곧 수행도 하노라 했고, 공부도 하노라 했다. 누구보다 배움이 빨라 노스님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거기서 오는 자만심이나 오만함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힘든 수행 과정을 버티는 힘이 되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조바심 같은, 절집에서 부르는 속효심(速效心) 같은 것도 있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며 정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느덧 경전을 읽어도 얼추 다 아는 것 같았고, 법어를 들어도 별거 아닌 것 같았다. 다들 대단한 발심으로 출가를 했을 텐데 왜 저 스님들은 저것밖에 못할까, 저러다가 언제쯤 깨달음을 얻을까 싶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 곁에는 10년 남짓 모든 생각을 서로 공유한다고 믿는 도반 스님이 있었다. 자신이 다른 스님들한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듯이 그 도반도 그러는 듯했고, 오직 자신만이 그 도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집 표현으로 ‘지음’(知音)이라는 게 있다. 음 하나만으로도 다 안다는 건데, 그녀는 자신이 그 도반에 대해 지음이라고 생각했다. 3박4일 동안 잠 안 자고 열렬하게 토론을 해도 지칠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반이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그녀를 떠나야겠다고 선언했다. 더는 같이할 수 없다고 할 뿐, 왜 그러는지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싸늘히 떠났다. 그러고는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어요.”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은 결코 우스개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져왔던 가치와 신념이 도반으로부터 통째로 부정당해 한꺼번에 무너지는 걸 느꼈다. 어디에 발을 딛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공부해야 할 이유, 아니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그 사정을 들은 다른 스님들이 절을 해라, 기도를 해라 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스스로를 유폐했다. 서너 시간 참선하다가 뛰쳐나가 산속을 헤매며 엉엉 울고 다녔다. 차라리 뛰어내릴까. 불교에서는 죽음조차 끝이 아니었다. 어느덧 넉 달이 흘렀다. 나를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 바닥 위에 있는 자신이 보였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모든 것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분별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이 해온 수행과 공부의 개념조차 분별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경계를 세우고 장애를 쌓아온 거였다. 도반은 알고 있었다. 도반에 대해 뭐든 다 안다는 듯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녀가 정작 도반에게 자신의 수행과 공부의 분별과 경계, 장애를 오롯이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도반은 그렇게 10년을 바라봐줬고, 기다려줬고, 또 그걸 누누이 말해줬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구나, 도반은 떠남으로써 내게 그걸 가르쳐줬구나, 너무 고마운 사람이구나…. 그게 하나씩 하나씩 보이는 거였다. 같은 곳에 있지 않고 멀리 있어도 이해가 되었다. 우린 지금도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오래전 일들도 새롭게 보였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그녀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남자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품성을 높이 샀다. 하지만 그녀 눈에는 그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읽어내는 그녀를 그는 신기하게 여겼지만, 그것 때문에 상처받기도 했다. ‘오만하게 위에서 내려다보지 마라. 내려와서 눈높이를 맞춰 달라.’ 15년 동안 그녀 주위를 어른거리던 그는 끝내 화를 내고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또 출가해서 수행 정진하기까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어느 면에서는 늘 제자리였음을, 바닥을 쳐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불가의 시간으론 찰나였다.


“내 스스로 만든 경계와 장애를 깨닫지 못하면서 다 아는 척,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댔던 거예요. 머리로야 왜 이해를 못했겠어요. 우리 수행과 공부가 다 그런 것들인데.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앎은 아니더라고.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조차 배워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니. 완전히 바닥을 치는 절망을 겪고 나니까 공부 자리에 (절망의) 경험 자리가 들어서는 거예요. 경계에 막힌 나를 미워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어요. 내가 스스로 용서해야 하고 스스로 사랑해야 하고 스스로 안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구나, 자비심의 자리도 바로 거기구나…. 공부도 다시금 시작됐지요.”

 

*

 

“히틀러는 악인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물음이었다.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물음이었다. 그녀가 출가하기 전에도, 일찍이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우리는 그런 식의 끝 간 데 없는 화두를 붙들고 밤을 새곤 했다.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사리를 엄격하게 따지는 게 소명인 직업에 20년 넘게 매달려 살았다. 여러 겹의 생각을 차근차근 거쳐야 뭐라도 답을 내놓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러기도 싫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죄송하네요, 스님!” 내가 자르듯이 말했다. “개인적으로야 딱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그는 수백만의 희생자들 앞에서 절대악입니다.” 그녀가 빙그레 웃더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히틀러가 악인이 아니라는 게 아닙니다. 히틀러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다만 내가 그걸 용서할지 말지, 그 분별할 자리에 있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내가 다시 말을 끊었다. “불제자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 현실은 그나마 히틀러를 타도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며 희생했던 사람들의 이성적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염화미소를 짓는다. 내 말은 다급한 프레스토고, 그녀 말은 느긋한 아다지오다. 속도부터 비대칭이다.

“그런데 히틀러가 돌연변이였을까요? 그 시대가, 동시대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욕망이 빚어낸 게 아닐까요? 이명박과 박근혜는 어떤가요? 지금 이 시대의 욕망이 저들에게 투사돼 있지는 않은가요? 절집에서는 그걸 동업(同業), 공업(共業)이라고 부릅니다. 내남없이 서로 짓는 업이지요. 히틀러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우리 모두가 지은 동업입니다. 동업은 함께 품고, 함께 아프고, 함께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고요.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도 그런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현실에서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이 오래전 기억 한 자락을 붙들어 일으켰다. 2005년 1월 지율 스님의 네 번째 단식이 80일을 넘어섰을 때, 스님이 칩거하는 서울 효자동의 손바닥만 한 단칸방을 찾았다. 뼈만 남은 몸으로 결가부좌를 하고 계신 스님 모습을 보고 눈물에 겨워 겨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스님의 답이 울대를 넘어 들릴 듯 말 듯 새어나왔다. “생명에 대한 동업을 지고 가는 거지요.” 스님은 100일 만에 구급차에 실려 나갔고, 얼마 뒤 다시 그보다 훨씬 길게 이어진 5차 단식에 들어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업’은 자신의 예외적 입지를 인정하지 않는 윤리적 태도라고, 나는 가까스로 번역한다. 거기까지다.

 

*

 

막걸리 병이 어느덧 다 비어간다. 외출 중인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금권을 휘두른다. “두 분 드실 것까지 종류별로 몇 병 더 사오세요. 돈은 제가 드릴게요.” 집 근처에 다 오셨단다. 안심이 된다.

“근데 아까부터 우리 대화를 왜 녹음하는 거예요?”

“아, 인터뷰 과제가 있어서요.”

여차저차 다시 글 공부를 하는 사정을 설명했다.

“하기야, 공부는 끝이 없는 거지요. 근데 처사님은 지금 글공부를 다시 해서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건데요?”


3인칭 글만 너무 오래 써와서 1인칭의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외려 타인이 감응하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됐다. 나를 표현하면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1인칭이 살아 있는 글,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내용과 결까지 1인칭인 글을 쓰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지요. 공감을 받는다는 건 매를 맞는다는 것과도 같아요. 두려워하면 작위가 들어가고, 억지로 짓는 글이 될 거예요.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할 때라야 감응의 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죽음 같은 절망을 겪으면서 17년 수행하고 공부한 끝에 내가 도달한 지점도 거기예요. 글쓰기나 내가 하는 거나 같아요. 언뜻 제자리 같지만 전혀 다를 거예요.”


현관문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다섯 번의 전자 음이 울리고 문이 활짝 열린다.

“안샌, 왔는가?”

또 다른 두 파안대소가 저기 보인다.


“처사님. 글로 성불하세요.”

국문학을 전공해, 출가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작가가 되었을지 모를 그녀가 서둘러 덕담을 건넨다. 둘은 잔을 내려놓고 합장한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벚꽃 색깔을 닮은 봄볕이 어느 샌가 거실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