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글

이름 부르기

얼마 전 딸들에게 “앞으로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은딸은 까불대며 “네, 아부지!”라고 받고, 큰딸은 “아빠,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다. 어느 공부모임에서 토론이 격론을 넘어 거의 언어폭력 직전까지 갔는데, 내가 바로 그 사건의 가해자였다. 맥락을 살피면 변명할 여지가 없지 않지만, 나이주의의 혐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시쳇말로 꼰대질을 한 셈이다. “이제부터 이름으로만 불러다오.” 재미있겠다 싶었는지, 딸들은 선뜻 수락했다. 지금도 불쑥 “아빠”라고 부를 때가 많지만,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는 바로잡는다. “아차, 영춘!”

두 딸을 오래전부터 “신소1”(큰딸) “신소2”(작은딸)라고 불러왔다. 둘밖에 안 되는 그녀들 이름을 무시로 바꿔 부르다가 나름대로 찾아낸 해법이었다. 남들이 제 자식을 “아들” 하고 부르는 게 남아선호의 언어 관습 같아 마뜩찮았던 터라, 그녀들을 내 입으로 “딸” 하고 부르는 것도 덩달아 내키지 않았다. 고작 대안이랍시고 두 딸에게 일련번호를 갖다 붙인 것인데, 그녀들은 그 물화된 표현보다 신소의 본디 뜻(‘신비의 소녀’)에 더 질색하곤 했다. 하지만 큰딸이 어느덧 소녀라 부르기에 민망한 나이가 된 지금, 그녀들은 남들 앞에서도 그 호명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신소’는 소유격의 느낌을 지우면서 상대를 향한 곡진함까지 품은 듯해 부를수록 입에 붙는다. 그리고 이제 부녀관계의 위상을 좀 더 수평적으로 도모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호명 고치기 시즌2’를 시작했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고, 철학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했다. 내가 “아빠”로 불려온 것이 내 나이주의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나, 사회적 통념을 깨는 ‘아빠 이름 부르기’가 내 안의 꼰대성에 미세한 균열이라도 내주길 기대한다.

이 나라에서 유독 호명이 까다로운 건 권위주의가 그만큼 강한 탓이다. 그러다보니 오해도 많을 수밖에 없다. 전라도 출신인 나는 어려서 곁에 있는 이를 3인칭으로 높일 때 “이 양반”이라 했는데, 서울 생활 초기에는 곧잘 멱살잡이의 빌미가 되곤 했다. 호명의 수용성은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대체로 “교수님”이라 불리고 싶어 한다. “선생님”은 초중고 교사들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교수들에게도 예외 없이 “선생님” 하는데, 그 호명에 불쾌해하는 교수를 여태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기자라는 ‘예외적인’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호명은 부르는 이와 불리는 이의 위상을 나타낸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생전 많은 이들에게 “어머니”로 불렸다. 부르는 이는 젊은 남성으로 간주되고, 불리는 이는 아무리 치열한 투쟁의 삶을 산 노동운동가라 해도 나이 든 여성으로 배치된다. 부르는 이들은 안온했을 것이다. 불리는 이는 어땠을까. ‘강제 위안부’는 ‘성노예’에 비해 정치적으로 온전한 호명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도 “성노예”라고 부르지만, 피해 생존 여성들은 (아직) 그렇게 불리는 걸 힘들어한다. 누구의 뜻이 존중되어야 할지는 자명하다.

혈육이 아니면서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가 이 나라에 딱 한 명 있다고 한다. 그 정치적 혈육이 자신의 당 대표를 “그 ××”라고 불렀다가, 누나도 어찌하지 못할 스캔들에 휘말려 공천에서 탈락했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김소월, ‘초혼’)였다. 온갖 ‘박’자 돌림의 호명을 비롯해 한바탕 정치 소극이 펼쳐진 뒤, 선량을 자처하는 이들이 떼지어 우리를 부르는 때가 왔다. 도드라지는 이름일수록 탁해 보인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신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대들의 미래를 위한 비장(秘藏)의 이름을 크게 한번 불러봐!”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