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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상실의 해석’…사랑도 싸움도 끝날 수 없다

[크라우드 펀딩] 4대강 기록관 건립 공공예술 프로젝트 ⑤


이명박 정부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던 4대강 사업, 그리고 7년. 그동안 아픈 눈으로 강과 강 주변의 변화를 지켜보았고, 그 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으며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지율 스님과 예술가들이 '4대강 기록관'을 지으려 합니다. 기록관은 모래강 내성천의 개발을 막기 위해 내성천의 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내성천 하류, 낙동강과 인접한 회룡포 강변 대지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연재는 기록관 짓기에 함께할 여러분을 초대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펀딩 바로가기)


ⓒ지율

남편 이름으로 온 편지에는 “5일에 집으로 돌아가노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남편은 오지 않았다. 역 앞에서 웬 낯선 남자가 주변을 오래 서성이기는 했으나, 남편은 아니었다.

영화 <5일의 마중>(감독 장이머우·2014)은 유독 남편 얼굴만 알아보지 못하는 심인성 기억상실증 아내와 그런 아내 곁을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다. 평자들은 이 영화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를 ‘상실’의 정조로 재현했다고 짚었다. 맞는 분석이긴 한데, 충분한 분석인지는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 분석에는 ‘어떤 상실이냐’가 결정적으로 상실되어 있다.

마지막 신에서 두 사람은 바로 직전 신보다 많이 늙어 있다. 아내는 여느 5일처럼 역 앞에서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남편은 아내가 눈을 맞지 않도록 곁에서 하염없이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상실은 해석돼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남편은 상실을 해석함으로써 아내에게 새로운 존재가 되어 관계를 이어간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는 영화나 “둘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로 끝나는 영화들과 달리, <5일의 마중>은 그렇게 ‘끝날 수 없는’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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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의 마중>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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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나는 내성천을 여러 차례 발로 걸어서 답사했다. 그러나 내가 첫사랑의 미열처럼 떠올리는 건 이듬해 봄 동호마을(경북 영주시 평은면) 물길에 첫발을 담갔을 때다. 물과 모래와 산이 어우러진 빛의 풍경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걷지 않고 다만 스미는 듯했다. 그러나 닥쳐온 시간은 험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성천은 영주댐 자리를 경계로 상·하류가 제가끔 피폐해졌고, 댐은 그보다 앞서 그만큼씩 우뚝해져 있었다. 댐은 홍위병의 깃발처럼 확고부동하게 나부꼈고, 내 기억은 ‘상실감’으로 개기일식처럼 검게 먹어들어 갔다.

2014년 2월, 전세버스를 타고 지율 스님이 이끄는 대로 찾아간 내성천 어느 마을은 이미 폐허 자체였다. 길은 죄다 변해서 어디로 드는지조차 식별할 수 없었다. 위로는 벌겋게 파헤쳐진 산허리에 도로와 다리가 까마득히 얹히고, 아래로는 주민들이 버려두고 떠난 논과 밭으로 들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폭설에 덮인 빈집에 들어 일행들과 오들거리며 하룻밤을 났으나,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난 지난봄, 영주댐 일대를 모두 돌아보고 다시 그곳에 이르러서야 머릿속 지도에 좌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동호마을을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끝내 그리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끝은 어디일까. 끝은 어떤 모습일까. 끝을 떠올리는 건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버렸지만 끝은 좀처럼 형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댐 완공 뒤를 보여주겠다는 조감도가 형상하는 것은 그 끝의 사실에서 가장 먼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총천연색 그림에서 내성천의 들숨 날숨 같은 물굽이와 모래톱의 웃고 우는 잔주름과 수달, 노루, 고라니, 흰목물떼새, 물자라, 왕버들 같이 스러져가는 뭇 생명의 정처는 어디 한 곳 점으로도 표시돼 있지 않았다. 애초 살아서 추방된 것들의 자리는 토건의 망상으로 그린 그림의 소실점 너머에 있었다.

그러나 동호마을 강변에는 아직 그대로인 것이 있다. 자매처럼 나란히 선 지율 스님의 움막과 ‘모래’라는 이름의 컨테이너 갤러리이다. 움막은 겉이 삭고 컨테이너는 군데군데 녹슬었지만, 그것은 내성천과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다. 이 둘은 <5일의 마중>에서 달력 한 장 한 장마다 ‘5일’에 표시된 동그라미처럼 흐르는 시간을 따를 뿐이다. 자연사(死)는 움막과 컨테이너가 꿀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꿈처럼 보였다. 댐에 견주면 점보다 작고 허술한 이 ‘건축물’은 댐에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건축물들이 줄줄이 맞은 타살의 운명을 비켜갈 수 있었고, 상실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응축된 ‘장소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해석은 기록 위에서 자라나는 나무다. 돌이켜보면 그곳에서 이루어진 일은 ‘기록’ 말고 없었다. 달리 더 있을 수도 없었다. 지율 스님이 처음 움막을 세웠을 때도 강과 들과 마을과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저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서울 조계사 들머리와 홍대 앞 두리반 철거 반대 투쟁 현장을 오가던 ‘모래’ 컨테이너가 옮겨왔을 때는 벌써 그 손아귀의 악력이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저들의 살뜰한 도륙에 맞서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진해질 노릇이었을 테니, 두 눈 부릅뜨고 하나하나 기록하는 일은 극한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았다면 지금 단 한 사람도 기억상실에서 예외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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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의 마중>에서는 끌려간 남편이 아내에게 썼던 편지들이 커다란 상자 하나 가득하다. 편지들은 제때 부쳐지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왔다. 아니, 편지는 오고 남편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남편이 뒤늦게 온 편지를 아내에게 읽어준다. 편지를 읽고 듣는 일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일상이 되었다. 둘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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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이 기록을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할 때와 어금버금하다. 사업 소식이 들리자 스님은 가장 먼저 낙동강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으로 갔다. 불가에서 말하는 발보리심(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었을까. 스님은 “이끌렸다”고 했다. 스님은 걸어서 낙동강 최하류 을숙도까지 갔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며 갔다. 고행과 순례의 시작이었다. 그 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전 구간을 혹은 구간을 나눠 발품 팔아 낱낱이 기록했다. 다시 들른 자리는 매번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과정을 겪은 이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고, 기록한 자만이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시절기 나듯 들르는 내게도 변화는 빠르고 확연하게 다가왔다. 낙동강은 살풍경으로 변해갔다. 지산습지와 해평습지, 습지라는 습지는 모두 파헤쳐져 사막이 되고, 마침내 경천대 앞 곱고 너른 모래밭마저 거센 물살이 차고 흘렀다. 그러나 파괴는 상실이 아니었다. 파괴 이후가 상실이었다. 토목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미학으로 인공을 들어앉혔다. 그 꼴이 거푸집에서 콘크리트로 찍어낸 ‘생각하는 사람’ 상만큼 조야해도, 과정을 모르면 감쪽같을 터였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르는, 완전한 상실일 것이었다.


ⓒ지율

내가 하릴없이 낙동강 본류를 바라볼 때, 지율 스님은 어느덧 여러 지천들로 눈길을 돌렸고, 이내 내성천으로 들어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내성천은 낙동강의 유년기 꿈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파괴는 시작되었다. 스님의 기록 작업도 거듭되었다. 작업은 이어질수록 정교해지고 기록은 쌓일수록 저절로 이야기가 되어갔다. 지율 스님의 기록은 사진전으로, 두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모래가 흐르는 강>과 <내성천, 물 위에 쓰는 편지>)로 세상에 나왔다. 그림 그리는 박은선은 스님 곁에서 끈질기게 내성천의 생명들을 그림으로 기록해 <내성천 생태도감>을 내놓았다.

지율 스님의 두 번째 영화 제목에 ‘편지’가 들어 있는 것은 마치 의도하지 않은 대유법 같다. 스님의 기록은 편지다. <5일의 마중>에서의 편지 또한 기록이다. 무엇보다 둘 다는 상실에 대한 해석이다. 어느새 지율 스님의 기록은 <5월의 마중>의 남편 편지보다 훨씬 많아졌다. 기록(편지)으로 매개된 상실의 해석은 끝날 수 없는 이야기(영화)다. 비관적 낙관주의자에게는 역사상 가장 질기면서 가장 거대한 사기인 종말론이 애초 없듯이.

영주댐은 12월 들어 물 채우기에 들어갔다. 스님과 ‘내성천의 친구들’이 낸 영주댐 철거 소송은 지난 18일 1심에서 원고 패소했다. 하지만 황동규의 비관적 낙관주의의 시 <즐거운 편지>처럼, 저 기록들이 있는 한 물 채우기와 패소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다. 앞으로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이다. 언젠가는 고운 모래강을 되살리고 황야로 변한 강가 들녘을 뭇 생명들의 습지 낙원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그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 아내에게 읽어주듯, 지율 스님을 비롯해 내성천과 낙동강의 본디 모습을 아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방대한 기록을 보존하고 읽게 할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4대강 기록관은 상실의 해석을 위한 장소이자 비관적 현실을 낙관적 의지로 넘어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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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할 즈음 ‘사소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23일 동호마을 강변 움막과 컨테이너가 강제 철거되었다고 한다. 박은선이 현장으로 달려가며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못난 사람들. 이런다고 굴복할 줄 아시나.” 움막과 컨테이너는 자연사하지 못했으나, 자연사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머잖아 회룡포(경북 예천군 왕궁면) 내성천 가에 움막과 컨테이너의 품성을 빼닮은 아담한 기록관이 들어설 테니까. 생명을 지키려는 싸움은 끝나려야 끝날 수 없다.

*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