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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형용사가 된 저널리스트, 손석희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4


‘손석희’와 ‘나’는 뜻하지 않게 ‘우리’가 되었다. 물론 대등한 관계는 아니다. 손석희는 불변의 상수인 반면 ‘나’는 다른 누구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변수다. 그렇다고 나는 썩 범용적이지도 않다. 나가 몇이든 그 쓰임은 손석희와 견줘짐으로써 손석희를 더욱 손석희답게 하는 데 국한된다. 수많은 나는 ‘손석희의 나들’이다. 적어도 우리를 우리라고 불러주는 이들에겐 그렇다.

손석희와 나가 우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같은 진영에 속할 필요도 없다. 영미 저널리즘을 사숙(私塾)한 한국 저널리즘은 중립을 표방하는 데 있어 보수와 진보가 대동소이하다. 중립의 포지션으로 ‘사실’의 기치를 세우지만, 정작 펄럭이는 건 ‘이미지’다. 손석희는 그 점에서 탁월한 거고, 손석희와 그밖의 저널리스트들의 차이도 지향의 차이라기보다는 그런 실력의 차이다.

그러나 실력과 영향력의 관계는 간단치 않다. 지난 5월 언론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76명이 손석희를 꼽았고, 2위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을 꼽은 학자는 단 한 명이었다. 별도 조사는 없었지만, 손석희는 실력도 1위라고 간주된다. 방상훈의 실력이 2위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도 가져볼 수 있다. 손석희의 영향력은 방상훈의 76배인가. 방상훈을 꼽은 학자에게는 오히려 방상훈이 한수 위일 것이다.

‘JTBC 뉴스룸’ 홍보 동영상. 유튜브 갈무리

실력은 자기 안에서 생성되기에 상대적으로 명백하다. 영향력은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변수가 너무 많다. 실력과 영향력은 이렇듯 다르다. 그리고 둘의 상이한 속성이야말로 손석희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규명하는 열쇠다. 손석희의 영향력은 손석희의 실력을 평면거울로 비춘 결과가 아니다. 실력과 영향력 사이의 굴절각은 계측 범위를 넘어선다. 그 결과, 작은 실력차가 ‘넘사벽'의 영향력 차이로 투사될 수도 있다.

영향력은 ‘마술의 이미지’다. 그럼 이미지의 마술사는 손석희인가. 앞의 글에서 논의했듯이, 손석희가 탁월한 이미지 연출가인 건 맞다. 하지만 이 스펙터클한 매직쇼는 그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언제든 연출에 넘어가기 위해 만반의 마음가짐을 한 관객이 여기 오종종 모여 있다. 공연의 콘셉트는 이미 관객들 욕망 안에 있었고, 손석희는 그 욕망을 채우는 충전재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

인구 5천만인 나라에서 올해 벌써 천만 관객 영화가 4편이나 나온 건 우리 사회의 집단적 정동이 반영된 ‘사건’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어떤 거대한 결핍이 가공할 만한 쏠림현상으로 나타난 게 아닐까. 손석희를 향한 쏠림현상은 이런 집단적 정동의 저널리즘 버전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손석희의 영향력은 박스오피스 티켓파워와 같다. 욕망이 투사되는 양태만 조금 다를 뿐이다.

천만 영화에서는 감성이 직접 육박하지만 손석희한테서는 이성이 앞선다. 그러나 이성은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일 뿐,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끝내 바라는 건 이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감성적인 터치다. 이성의 작동이 멈춰버린 ‘헬조선’에서 차갑되 단호한 이미지를 뜨겁게 욕망하는 건 형용모순이지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 고차방정식의 욕망은 한끗의 실력차라도 앞선 대상에게 쏠린다. 누구겠는가.

‘손석희’는 더는 손석희 소유의 개인 이름이 아니다. 한 존재를 표상하는 고유명사를 넘어 집단적인 욕망이 담긴 일반명사다. 한국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저널리스트의 상(像)이 된 이 반듯한 언론인은, 다른 언론인들의 롤모델로서 1인칭 복수형 ‘우리’를 이끈다. 그렇게 ‘손석희’는 명사를 넘어서 규범적 상태를 이르는 형용사의 품성까지 띠게 되었다. 다만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손석희의 나들’ 바깥에서, 나는 그런 그를 셀러브리티(셀럽)라 부른다.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