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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손석희는 현실이다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3

손석희의 힘은 ‘중립’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가 중립의 포즈로 가공할 힘을 얻는 건 ‘개입하는 중립’이라는 그만의 ‘예외성’ 때문이며, 그 예외성은 실재가 아닌 이미지 위에서 성립한다. 앞의 두 차례 논의를 요약하면 그렇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일 것이 있다. 이미지는 헛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헛것이라면 손석희의 힘은 다만 초자연적인 현상일 터이다. 이미지를 진퉁과 짝퉁의 위계적인 이분법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미지는 ‘현실’이다. 심지어 실재와의 이항대립 관계를 넘어서, 현실의 많은 부분은 여러 겹의 이미지들끼리만 구성되기도 한다.

가령,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이 한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와 제목이 같은 건 숫제 우연일까. 미드 <뉴스룸>은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는 중립 성향의 앵커가 차츰 시청률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진실 추구의 과정으로서 ‘진짜 뉴스’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손석희가 이 드라마를 무척 즐겨봤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그가 지난해 가을 개편 때 채택한 프로그램 제목이 보통명사를 넘어서 그 드라마와 알레고리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건 합리적인 추론이다. 드라마 주인공과 손석희의 관계는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무엇이 드라마(픽션)이고, 무엇이 뉴스(팩트)인가. 드라마의 플롯은 손석희에게 있어서 그가 채택한 중립의 포즈와 개입의 행위 사이를 매끄럽게 타고 흐른다. 그러나 드라마가 기승전결로 나아가는 것에 견줘 손석희가 하루하루 맞닥뜨리고 헤쳐 나가는 과정은 시계추의 진자운동에 가깝다. 중립과 개입이라는 이중의 전략으로 사투를 벌이더라도 그건 악무한의 과정일 뿐이다. 진실 추구의 과정으로서 저널리즘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역설적으로 신화 속 시시포스의 운명에 갇히고 만다. 드라마에는 해피엔딩이 예정돼 있지만 손석희에게는 없다.

손석희는 <경향신문>이 갖고 있던 성완종 육성 녹음을, 대대적인 예고까지 해가며 가로챘다. 송유관을 뚫어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를 빼돌린 절도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의적의 무용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현실은 드라마의 현실과 달라서, 무리수를 둬야 할 때도 있다. 나는 그가 성완종 녹취록을 보도했을 때보다 그 뒤에 보여준 당당함에 더 놀랐는데, 그의 태도가 뻔뻔하다기보다 차라리 확신에 차 보여서였다. 그는 진실 추구의 담지자로서 1인칭 주어의 서사를 써간 건지도 모른다. 육성 녹음도 이미지일진대 소유권 따위야.

손석희가 아니었어도 <경향신문>이 곧 육성 녹음을 보도했을 거라는 짐작 역시 합리적인 추론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미 사태의 성격은 ‘무엇을’에서 ‘누가’로 넘어간 뒤였다. 내가 일하는 매체에서 손석희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담은 외부 필자의 글을 싣고 난 뒤 쏟아져 들어온 항의전화를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손석희가 진실을 폭로한 게 그렇게 못마땅하냐.”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거냐. 너희나 똑바로 해라.” 개중 우호적인 전화는 이런 거였다. “이토록 엄혹한 시기에 우리끼리 싸우면 어쩌자는 거냐.” 그 순간 손석희와 나는 1인칭 복수였다.

나는 어쩌다 그와 ‘우리’가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와 나는 대등한 ‘우리’가 아니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관계다. 손석희는 리더이고, 나는 멤버다. 둘의 위상차를 생각하면 나야 영광스러운 노릇이지만, 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건 분명하다. 물론 그의 선택도 아니다. 그는 평소 더없이 엄격하게 준칙(중립)을 지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활극(개입)을 감행했을 뿐인데,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포박되었다. 이거야말로, 그가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분명 나는 맥없이 갇히고 만, 둘 다의 번연한 현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는 걸까.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