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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이미지가 된 슈퍼 저널리스트

-손석희는 손석희인가 2

‘손석희의 피부색은 희다’라는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내 기준으로 볼 때는 참이고, 백인들 기준으로 볼 때는 거짓일 것이다. 그런데 유전적으로 피부색이 흰 인종집단(내 눈에 백인 피부색은 붉어 보인다)은 다른 인종집단을 ‘유색인종’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의 피부는 색깔이 없다는 뜻인가. 백인은 색이 없는 게 아니라 색의 분류체계 너머에서 다른 인종에게 색을 ‘부여’하는 권력을 쥔 인종이다. 이로써 피부색은 차이가 아니라 위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중립성과 예외성의 정치다.

손석희 하면 떠오르는 건 그의 피부만큼이나 투명한 중립성이다. 그러나 백인이 무색인종이 아니듯 손석희도 무색무취한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개입하되 발을 담그지 않을 뿐이다. 색깔 없는 색, 냄새 없는 냄새다. 우리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게서 한껏 신뢰를 느끼다가도 그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순간 짜릿한 쾌락을 얻는다. 손석희의 체온은 차갑게 느껴지는데, 우리는 열광한다. ‘쿨한 열정’은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모순은 융합된다. 중립에 열광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중립이기에 더욱 열광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손석희는 미디어 종사자, 즉 중간 전달자다. 그러나 미디어는 한순간도 전달자 노릇에 그친 적이 없다. 스스로 중립의 이미지를 두름으로써 예외성의 입지를 얻을 수 있었고, 세상 모든 걸 이미지로 만들어 유포해왔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건 TV가 바보여서가 아니라 시청자를 이미지로 현혹해서다. TV가 만든 이성적 이미지는 비이성적이다.

영화 ‘트루먼쇼’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지배하는 시뮬라크르 세계다. 우리는 지금 영화 <트루먼쇼> 뺨치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방송을 장악하고, 제목에 ‘쇼’가 들어간 뉴스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미디어 환경에서 손석희의 포지션은 묘한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저널리즘의 타락에 맞서 사실 전달자로서 저널리즘의 원형을 꿋꿋이 지키는 단독자처럼 비친다. 문제는 그럴수록 손석희 자신도 이미지 안에 더욱 단단하게 결박되어간다는 것이다.

중립이면서 예외인 ‘신공’은 손석희가 아니라 손석희의 이미지가 감당하고 있다. 그는 30대 여성 피아니스트 출연자가 <논어>를 읽었다고 하자 “30대 여성이 논어를 읽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여성분들은 서른 하면 잔치가 끝난다면서”라고 반응한 적이 있다. 중립의 포지션을 잃고 성인지적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문제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예외적으로’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방송에서 저 발언을 내가 했다면 손석희만큼 성치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진짜 큰 문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석희가 전달하는 뉴스를 보는 게 아니라 뉴스가 손석희에 의해 전달되는 것을 보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뉴스가 시시콜콜 가십으로 보도되는 현상은 징후적이다. 그는 우상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지만 영향력은 우상보다 훨씬 세다. “사실의 문제는 이제 무엇에서 누구로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의 신뢰가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능에 있다면, 이 신뢰의 문제도 개인의 명망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 인문학자 이택광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손석희 자신은 이런 실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빼어난 이미지 연출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 팽목항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기간 내내 그는 같은 옷차림을 했다.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단벌로 버틴다고 믿었다. 동행한 코디네이터는 놀고만 있었을까. 설령 단벌이었다 해도 다른 옷이 없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 그의 클로징 코멘트 스탠딩 샷은 더없이 장엄해졌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교회 설교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지만, 그의 제 색깔도 차츰 감지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그 색깔 얘기를 해볼까 한다.

※ <한국방송대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