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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글쓰기 책 범람의 시대, 별자리 같은 길잡이

[서평]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좋은 글을 욕망하다


월간지 <나·들> 편집장 할 때 필자였던 이가 글쓰기 책을 냈다고 알려 와서 얼른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요즘 출판계 화두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 책 범람’이라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인세가 호구지책인 이에게 ‘한 권 보내 달라’고 얌체 짓은 못하겠어서 광역버스 타고 서울 광화문의 대형서점으로 향했다. ‘글쓰기 책 전성시대’는 당장 한눈에 들어왔다. 계산대 부근 목 좋은 곳에 따로 마련된 특별 서가에 이런저런 필기구가 그려진 책 표지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분류표기를 보지 않더라도 대번 서가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지인의 책은 ‘아직’ 거기 없었다.

책을 찾아 매장 안을 무작정 서성이다가 평소 서점에서 기획 전용공간으로 쓰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임대아파트 거실 크기는 족히 되는 그 별실을, 정치인에서 작가로 돌아왔다는 어느 셀러브리티의 글쓰기 책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여기가 저택이면 앞의 특별 서가는 원룸 고시원에 불과했다. 똑같은 책들로 사방 가득 둘러친 벽면들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조차 성에 차지 않았던지 모니터에서는 저자의 동영상이 무한재생, 무한반복되고 있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글쓰기의 본성은 독점적 패권, 시각적 자극, 그리고 반복과 주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 표지 디자인에 그 셀러브리티의 얼굴 사진이 들어가고, 제목에 이름 석 자가 포함된 건 인심세태라 치더라도,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이라는 표지 카피는 보험사 영업왕이 쓴 책에 훨씬 맞춤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 카피가 유별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탁월한 ‘전범’이라 해야 맞을 성싶었다. 특별 서가에서도 어슷비슷한 부제나 카피를 여럿 목격한 터였다. ‘직장인과 대학생을 위한 실용 글쓰기 연장통’과 ‘자동차 운전면허 따기보다 더 쉬운 글쓰기’는 한 권의 책에 붙은 부제와 카피였다. 바로 옆에 배열된 책의 부제는 무려 ‘대통령의 필사가 전하는 글쓰기 노하우 75’였다.

이렇게 대놓고 호객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글쓰기 책들은 형식과 내용에서 대부분 ‘실용서’를 표방하고 있다. 한번 읽으면 글쓰기에 즉각적이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원샷원킬’과 ‘유캔두잇’이 마케팅 소구점이라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와 다르지 않다. 보고서나 과학논문이면 모를까, 적어도 자신의 사유를 담아 소통하는 글을 쓰려 치면 이 실용서들은 실용적이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반실용적이다. 스파르타식 창의력 교육이 창의력을 억압하는 이치다. 글은 인수분해가 아니라 총체성의 구성이다. 글쓰기 팁을 100만 가지 나열해봐야 글 한 편 완성하는 데는 무용하다.

내가 읽어본 글쓰기 책들 가운데 예외가 있다면 <네 멋대로 써라>(데릭 젠슨)가 유일하다. 이 책은 실제 글쓰기 강의 경험을 흥미롭게 이야기로 풀어 쓴 논픽션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는 비록 실용서 성격이 없지 않지만, 좋은 글과 문장에 대한 철학이 실용적 접근과 잘 조화하고 있다. 지인의 책이 어느 쪽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지인은 글쓰기 강좌 경험이 풍부하다. 하지만 자신을 글쓰기 강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학생’ ‘수강생’이 아닌 ‘학인’들과 함께 읽고, 대화하고, 쓴다. 나는 <네 멋대로 써라>의 한국 버전 정도를 떠올렸다.

네 멋대로 써라, 문장강화, 글쓰기 생각쓰기(왼쪽부터)

지인의 책은 돌고 돌아 ‘신간 서적’ 매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의 신생아실쯤 되는 곳이었는데, 세상에 첫선 보이는 책들이 좁다란 테이블 위를 꼭 표지 크기만큼 차지한 채 쌓여 있었다. N분의 1의 평등! 그러고 보니 현실에서 평등은 예외 없이 이처럼 협소하고 궁벽하게만 실현되는 지극히 예외적인 가치였다. 책을 몇 권 집어 든 뒤 계산대로 가서 셈을 치르며 ‘신간은 모두 저 매대를 거쳐 가느냐’고 물었다. “대개는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책들도 있다는 뜻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야 좋은 건 아니다. 문제는 용이 개천의 귀한 생명체를 말살하는 데 있다.

지인의 책은 예상대로였다. 연구공동체, 학습공동체, 마을공동체, 시민단체 등에서 글쓰기 공개강좌를 계속하고, 나아가 성폭력 생존 여성들과도 함께 강좌를 진행하면서 얻은 풍부한 경험을 특유의 정갈한 문체와 자분자분한 서사로 풀어놓았다. 글 쓰는 일과 전혀 접점이 없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집합명사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고유명사로서의 삶을 지켜내고자”(8쪽) 공부와 글쓰기를 시작한 뒤 스미듯 작가의 길로 들어선 저자의 고유한 경험은 글쓰기 강좌에 그대로 투영되었고, 마침내 그 어떤 책과도 다른 한 권 일엽편주가 실용적 글쓰기 책들로 범람하는 탁류 위에 띄워졌다.

이 책의 최고 미덕은 풍부한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여느 책들의 ‘내가 써봐서 아는데’류와 다르다. 그런 경험담들은 대개 경험의 사후 분석이어서 독자가 적용하는 단계에서는 글쓰기의 역주행이기 십상이다. ‘개요 짜기’가 그렇다. 글쓰기 전에 개요를 먼저 짠 다음 거기에 맞춰 글을 쓰라는 팁은 꽤 많은 책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강조되는데, 나는 그렇게 써본 적이 없고, 아는 글쟁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쓰기 싫어서가 아니다. 글이 머릿속에 미리 내장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쓸 수 없어서다. 정작 저 책들이 말하는 개요 짜기의 실상은 다 써놓은 글에 대한 사후 구조분석이다.

른 책들이 쉽게 범하는 경험담의 오류, 일삼아 저지르는 분식(粉飾)을 이 책이 피해갈 수 있는 건 무엇보다 그 경험이 ‘유레카’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우월한 위상의 개인이 득문(得文)을 설파하는 포즈를 취하지 않는 것도, 영업왕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려야 그럴 수 없다.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인이 썼지만, 개인에 의해서만 쓰이지 않았다. 저자 자신이, 그리고 많은 학인들과 더불어 경험한 여러 겹의 변화 과정이 1인칭 단수와 1인칭 복수 사이로 난 물길을 따라 나직하고 잔잔한 고백의 서사를 이루며 흘러간다.

그래서 이 책은 ‘글쓰기 이야기’ 책이다. 한번 손에 쥐면 내려놓을 타이밍을 찾기 어렵다. 끊어서 읽거나 아무 데나 중간 중간 골라 읽으면 맥락을 따라갈 수 없다. 막장드라마는 그런 식으로 봐도 스토리를 알 수 있지만, 클리셰가 없는 이 책은 불가능하다. 파편 같은 경험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글쓰기 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 때문인데, 글쓰기 팁이 드문 건 이 책이 독자에게 베푸는 미덕이자, 저자와 책 자신에게도 큰 복이다. 이 책은 팁을 내세우는 대신 글쓰기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글쓰기 팁은 그 여정 속에서 문득문득 보석처럼 빛을 내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책이 <네 멋대로 써라>보다 한층 더 성취한 게 있다면 글쓰기 과정을 ‘쓰기’에만 국한하지 않은 것이다. 읽기-말하기-쓰기가 이 책에 기록된 글쓰기 여정이다. 각자 책을 읽어 와서 토론하고 글감을 찾아내 다시 각자 글을 써온 다음 합평하는 것까지가 저자의 글쓰기 강좌 구성이다. 그 과정이 가슴 뭉클하거나 소소한 웃음을 자아내는 에피소드들과 함께 소개되는데, 그 에피소드와 날렵한 담론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글쓰기 전 과정이 담긴 한 권 책으로 짜였다. 이 책의 구성은 Literature(문학)와 Literacy(읽고 쓰는 능력)가 한 뿌리의 단어라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지만, 저자가 이 과정을 각별히 중시하는 건 글쓰기란 “내 몸이 여러 사람의 몸을 통과하는”(77쪽)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를 품고 있는 글쓰기, 고백과 대화와 토론을 품고 있는 글쓰기, 썼다고 해서 끝나지 않고 다시 대화와 고쳐 쓰기로 이어지는 글쓰기…. 저자가 생각하고 좇는, 모름지기 글쓰기 본성에 부합하는 글쓰기다. 저자와 학인들은 그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거치며 변해 가는데, 나와 우리, 세상에 대해 사유하고 감응하고 (글쓰기로) 실천하는 ‘신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이행이다. 글을 쓰려면 글쓰기 팁을 외워서는 불가능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신체로 몸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걸, 사실 자기 글을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표현을 빌려 ‘별자리적 글쓰기’의 가치를 높이 산다(167쪽). 글쓰기에는 건축적 글쓰기와 별자리적 글쓰기가 있는데, 저마다 흩어져 빛나는 별들 사이를 먼 눈으로 금을 그으면 별자리가 태어나듯이 글의 구성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그렇게 구성되고 전개되는 글을 ‘맥락적인 글’이라고 표현하는데, 별자리적 글쓰기가 감각으로 훨씬 잘 와 닿는다.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전체가 별자리적 글쓰기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는 사람들(왜 이름이 없겠는가마는)의 글쓰기 이야기가 금으로 이어져 별자리 닮은 책으로 태어난 것 같다.

“밤이고 낮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23쪽)

가르쳐지지 않는 건 가르칠 수 없다. 글쓰기가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나쁜 글쓰기 책은 가르치려 드는 책이다. 좋은 글쓰기 책은 좋은 글의 씨를 뿌리고 나쁜 글쓰기 책은 나쁜 글의 씨를 뿌릴 것이다. 나는 족집게 강사 행세를 하며 글쓰기를 가르치려 드는 이들과 책들이 넘쳐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일전에 트위터에 “‘저나 잘 쓰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책도 없지 않다. 불량식품 비슷한데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다”고 꼬집었다. 이 책은 가르치려 들지 않고 별자리 같은 길잡이 구실을 한다. 나는 그 별자리를 보며 좋은 글에 대한 욕망을 새삼 일깨웠다.

그래서 지인이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품었던 불안과 안타까움을 살며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어둡기에 별자리 같은 이 책이 더욱 빛날 것을 믿는다. 이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은유 지음·메멘토)이다.

※ <미디어스>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