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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까방권’으로 시작하는 셀럽 이야기

※ 한동안 셀러브리티(셀럽)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셀럽 현상이 현재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력한 분석 틀이라고 여긴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까방권’이라는 누리꾼 용어는 아직 국립국어원 ‘신어사전’에는 등재되지 못했지만, 네이버 ‘지식인 오픈국어’에 낱말의 뜻과 다양한 파생 용례뿐 아니라 발음 규정(‘꿘’이 아니라 ‘권’이다)까지 친절하게 소개돼있다. 까방권은 ‘까임 방지권’의 축약어로, “한 번의 활약으로 다른 잘못에 대한 비난을 면제받는 권리”라고 한다. 이토록 탐나는 무형의 증서를 발급받은 이가 누굴까 봤더니, 버전이 오래된 탓인지 안정환, 이승엽이 예시돼있다. 나는 몇 해 전 김연아가 그렇다고 들은 적이 있다.

사전은 이 낱말의 기원을 중세시대 ‘면죄부’에서 끌어오는데, 아무리 유희라 해도 억지스럽다. ‘천국’을 보장한다는 것 말고 둘의 공통점은 없다. 면죄부는 오로지 돈에 의해서 매개되지만, 까방권은 돈의 개입 여지가 전혀 없다. 자발적인 발권이다. 또한 면죄부는 발권 주체가 어느 교회로 특정되는 데 반해 까방권은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다. ‘사생팬’쯤 될까 싶지만, 사생팬에게 ‘우상’은 애초 평가 너머의 존재다. 까방권의 주체는 ‘평가’한다. 결과를 ‘집행’하지 않을 뿐이다.

개그를 다큐로 받느냐고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까방권은 한번 웃고 넘기기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개념을 담고 있다.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라는데, 이 생경한 표현이 최근 우리 사회에 출몰하는 낯선 사건들을 해석하는 데 쓸 만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까방권과 사생팬이 서로 조응하지 못하는 것도 까방권이 기존의 ‘팬덤’ 현상과는 전혀 다른 현상에 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워보자. 나는 까방권에 조응하는 새로운 현상의 유력한 후보로 ‘셀러브리티’를 꼽겠다.

물론 셀러브리티(셀럽)가 별안간 출현한 존재는 아니다. ‘지식인 오픈국어’에 예시된 이들이 셀럽보다는 우상 쪽이라는 점도 다소 개운치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셀럽과 우상은 단절되지 않은 점이적 관계다. 까방권은 애초 우상을 향했지만, 점이지대를 가로질러 자신과 더 잘 조응하는 셀럽 쪽으로 좌표 이동을 하지 않았을까. 셀럽은 그렇게 까방권과 조우함으로써 더는 ‘명사(名士)’로만 직역되지 않고, 동시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1000명의 셀럽을 병렬하는 것보다 셀럽의 위상과 사회적 관계방식, 즉 위치성을 규명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팬질은 열혈적일수록 우상에 대해 수동적 위치에 배치되지만(“사랑밖엔 난 몰라”), 까방권은 발권 주체가 상대에게 쿨하게 베푸는 형식을 취한다(“뭘 해도 괜찮아”). 베풂의 대상이 우상이 아니라 셀럽인 까닭도, 니체에게서 빌리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우상)과 아폴론적인 것(셀럽)의 상대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예인 셀럽’은 이들 두 특질을 한 몸에 구현한 존재(로 간주된)다. 이들의 자격조건은 ‘개념 탑재’다. 디오니소스적인 활동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정치적·사회적 의제에 대해 아폴론적으로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대개의 연예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위상을 획득한다. 그 위상에 부여되는 상징적인 현물이 바로 까방권이다. 그러나 까방권은 발권과 동시에 모순에 빠지고 만다. 셀럽에 대한 ‘무한 승인’이야말로 지독히 반 아폴론적이기 때문이다. 셀럽의 위상과 영향력이 극대화된 사회는 그 모순의 원인이자, 배경이며, 현상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사회의 진면목을 최근 극적으로 목격했다. ‘셀럽 언론인’ 손석희가 고 성완종 회장의 육성 녹음파일을 ‘무단’으로 보도한 사건을 통해서다. 그 사건은 내가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길고 깊게 얘기하려고 마음먹고 착수했다. 다음 글은 곧바로 손석희로 시작할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셀럽 사회 대한민국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