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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된 글

정치적 애도가 본질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나고 처음 만든 <나·들>에 썼던 기사다. 1년이 지나고 돌아보니 참사 이후의 시간은 그때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나쁜 시나리오가 하나하나 현실화된 시간이었다. 그래서 세월호는 현재진행형의 참사다.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 인터뷰

철학자가 본 세월호 참사 애도

[나·들 2014.05 제19호]
 
 
 

세월호 참사는 ‘죄 없는 아이들의 희생’을 넘어 ‘가장 약한 존재의 침몰’이다. 철학아카데미 대표 김진영 선생은 애도의 정의를 바로잡고 죽은 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한겨레 박승화

 
 

이 인터뷰의 모티프는 영화 <밀양>(2007)이다.

유괴 뒤 살해된 어린 아들을 화장장 불길 속으로 떠나보내는 신애는 대성통곡하는 아이 친가 가족들 뒤에 몇 걸음 떨어져 세상에서 가장 먹먹한 표정으로 기진해 있다. 절차가 끝나자 옛 시어머니는 “남편 잡아먹더니 아들까지 잡아먹고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독한 년”이라고 욕을 하고 가버린다. (남편은 몇 달 전 혼외 관계의 다른 여성과 함께 교통사고로 숨졌다.) 신애에게 슬픔과 고통은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속수무책으로 견뎌지는 것이다. 울음조차 그녀에게는 아직 이르다. 여러 날 격렬하게 기침을 쏟아내고서야 비로소 오열하는 신애는, 곧 기독교에 귀의해 신의 뜻에 따라 살인자를 용서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살인자가 ‘셀프구원’을 받은 것을 보고 신에게 배신감을 느껴 이상행동을 보이다 정신병동에 격리 수용된다.가장 상처받고 고통받은 신애는 왜 다시 비난까지 받고 소외됐을까. 덜 상처받고 덜 고통받은 사람들은 어쩌다 더 취약한 존재에 대해 가해자의 위치에 섰을까. 그리고 죽은 아이는 어디로 갔고, 산 자 가운데 누구와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거대한 참극이다. 시간의 흐름은 정해진 결말을 잔인하게 확인시켜주는 데만 갈수록 유용해 보인다.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여 있다’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회 전체’라는 주어는 정확하지 않다. 참극을 대면하는 개개인의 실존은 통합된 하나로 의인화될 수 없다. 사고를 유발한 누구는 단죄될 것이고 수습 과정에서 누구는 사과할 테지만, 단죄되는 자와 사과하는 자도 통합된 하나가 아니다. 아래로 갈수록 책임만 있고 위로 갈수록 권한만 있는 위계 관계이기에 사과하는 자는 끝내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혔고, 격분과 우울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은 그들끼리, 또 희생자·생존자 가족들과도 하나일 수는 없다. 애도 분위기는 차츰 높아지는데, 어쩐지 포기하는 심리와 겹쳐 보인다. 애초부터 희생자들의 육성은 들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혈육을 잃은 이들의 목소리도 갈수록 작고 드물게 전해진다. 시간은 또 흐를 것이다. 시간을 이기는 상처는 없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 그러나 영화의 은밀한 은유처럼.

 

사인화·예외적 입지에 바탕을 둔 ‘유사 애도’

 

<나·들>은 지난 4월25일 철학아카데미 대표인 김진영 선생과 만나 이번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 선생은 독일에서 아도르노와 베냐민을 전공했으며, 상처와 애도를 철학의 주제로 삼아 깊이 연구해왔다. 김 선생은 이번 참극의 상처와 애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냉철함’을 각별히 주문했다.

“안타깝게도 이번 참사의 성격을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됐다’고 보는 데 우리 사회가 거의 합의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학생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희생됐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냉철하게 보면 그것은 죽은 자들을 상징화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도 육체를 가진 고통의 존재인데, 상징은 그들을 육체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과의 실제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설령 그들을 상징화하더라도 ‘아이들’이 아니라 ‘가장 약한 존재’로 상징화해야지요. 우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운명이 ‘침몰’하고 ‘익사’한 것으로요. 정부와 권력 비판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가혹하게 해부학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외과 의사가 사람 배를 열어놓고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병을 확실히 찾아내려면 내장을 정확히 들여다봐야지요. 지금 미디어들을 보면 정반대로 너무 감성적이어서 선정적입니다.”

 

나·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을 ‘애도’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김진영(이하 김)- 세 개의 개념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왜 일어났느냐를 봐야지요. ‘야만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정치, 문화가 가진 야만성 말입니다. 둘째는,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 거냐입니다. 희생제의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로부터 정치권력이 위기 때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자를 선발해왔듯이 이번에도 희생자를 만들어내서 모든 것을 대속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예외적인 입지’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로, ‘반복본능’ 또는 ‘반복충동’에 관한 것입니다. 원래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인데, 개인에게 트라우마나 억압 현상이 있으면 그것을 되풀이하려는 욕망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반복본능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 국가에도 있습니다. 국가이성이 반복충동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니까 이런 비극적인 참사가 되풀이되는 거예요. 반복충동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애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애도는 산 자들이 슬픔을 정리하는 방식 아닙니까. 결국 배 밖에 있는 우리가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김- 개인 차원에서 보면, 그리고 자연사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이런 사태에서는 다릅니다. 이것은 자연사가 아니라 인재이고 억울한 희생입니다. 이 경우 애도는 정의(正義)의 문제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 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정의! 죽은 자들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이냐, 죽은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줄 것이냐입니다. 배 안에 아직 많은 아이들이 남아 있는데, 그 아이들을 못 찾는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이 배 속에서 안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권리 복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무참하게 박탈당한 죽음에 관한 권리를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신분석학적인 애도가 아니라 정치적인 애도입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애도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들- 애도의 정치학을 통해서 죽은 자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김- 그렇습니다. 그것이 애도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정의로운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는 건 아주 어렵고 복잡한 문제입니다. 대통령부터 해서 정부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이 왜 잇따라 터무니없는 발언과 행동을 할까요. 바로 그들이 ‘예외적 입지’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고, 나는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았고 당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자기 믿음과 자기 기만이 내면화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특권의식,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는 간접의식은 죽은 자가 상징화돼 있을 때, 즉 침묵하고 있는 이미지 앞에서 더욱 쉽게 투사돼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예외적 입지가 꼭 그들만의 것일까요. 지금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분노, 우울, 한탄뿐 아니라 담론까지 그 모든 ‘슬픔 작업’도 그것을 전제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죽은 자들과 정의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숙고해봐야 합니다.

 

나·들- 살아 있다는 것은 예외적인 특권을 갖고 있는 것이고, 우리 역시 그런 조건 안에서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로 들립니다.

김-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에서 보면 죽은 자와 산 자의 문제는 누가 누워 있고 누가 서 있느냐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나는 서 있는데 상대는 쓰러져 있는 데서 권력충동이 생깁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어디서 올까 질문해봐야 합니다. 과장되게 표현하면, 마음껏 분노하고 마음껏 우울해하고 마음껏 눈물 흘리는 그 자유가 도대체 무얼 전제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떤 분위기에 싸여 있습니까. 저는 자유주의, 리버럴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광고가 끝없이 유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유주의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체가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 자유주의적인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적 개인들이 그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타자의 불행이나 고통 앞에서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당연히 눈물 흘리고 슬퍼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나 판단에 대한 성찰도 해야 합니다. 지금 자칫 진영 논리로 빠질 가능성도 엿보이는데, 어쩌면 양쪽 진영은 대칭적인 거울상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애도를 해본 적이 있던가. 오늘날 우리의 감정 처리 방식은 이미 교육받았거나 합의된 상태다. 회로화된 감정의 정치를 벗어나 제대로 분노하고 제대로 성찰할 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해진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서로 위로를 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왼쪽). 한겨레 김명진
 
나·들- 그런 성찰이 왜 꼭 애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하나요.

김- 애도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맺어온 관계를 상실한 것에서 비롯된 슬픔 작업이 하나이고, 그 관계의 문제점도 함께 성찰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죽음 앞에서,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만 열리는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입니다. ‘감정정치’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감정은 이미 회로화돼 있습니다. 어떤 사태를 만나 감정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이미 교육받았거나 이미 합의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과연 정치권력이 세운 좌표로부터 예외적이고, 주체적이면서, 외부적인 표현 가능성을, 그런 발본적인 반응력을 실제 갖고 있을까요. 그게 있다면, 아마도 직접 상실한 사람들한테 있을 것입니다. 그 직접 상실이 트라우마로 남는 것이고, 치유된다고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양심적인 사람들도 예외 없이 10년, 20년을 견디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기존 담론에 기대지 않고, 완전히 공백 상태에서 발본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을 위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 현실생활의 영역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이 잡히지 않는다. 이를테면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라서, 분향소를 찾아가 눈물짓는 저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설령 감정의 회로에 갇혀 있더라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분노하며, 어떻게 하고 싶다고 욕망한다. 이것도 죽은 자와 직접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닐까.

“우리 말에 아는 사람만 아는 게 있다고 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게 ‘고통’입니다. 아이를 수술실에 보내는 부모마저도 아이의 고통을 대변할 수 없고 대리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즉 겸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쉽게 고통의 대리체험을 얘기하지 않는 대신 선박이 침몰하고 아이들 주검이 훼손되는 것을 보며 정작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의 조건이 침몰한 절박한 현실에 눈뜰 때 죽은 자들의 고통이 왜 내 고통일 수밖에 없는지 자기관찰의 지평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예외적 입지와 감정정치의 회로에서 벗어나, 내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자유, 존엄성, 권리가 빼앗겼을 때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들- 참사 이후 ‘대한민국호가 침몰했다’고 탄식들을 하는데, 그 수사법도 거기에 해당될까요.

김- 역시 죽은 자로부터 새로운 모럴을 생각해봤느냐가 중요할 겁니다. 발터 베냐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역사는 비상사태인데 정상상태처럼 돼 있다.” 권력자들이 정의를 법으로 대체하면서 이것이 정상상태라고 설정했지만 시민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비상사태였습니다. 살아 있는 나는 정상상태고 침몰한 선박은 비상사태인 게 아니라, 정상상태가 비상사태라는 걸 인지하고 비상사태를 진정한 비상사태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비상사태는 진정한 정상상태로 건너가기 위한 비상사태입니다. 베냐민은 죽은 자들과의 연대에서 답을 찾습니다. 지금도 이 비상사태에서 적들이 끊임없이 승리하고 있는데, 적들이 계속 승리하면 산 자뿐 아니라 죽은 자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죽은 자에 대한 전혀 다른 설명입니다. 죽은 자들 앞에서 우리는 이미 끝났다고, 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절망하는데, 이 절망은 정당한가. “아이들이 배 속에서 안 나오고 있다”고 앞에서 말한 건 그런 의미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무언가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 정치학자 야코프 타우베스는 “유대교에서 죽음은 사랑의 끝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었든 살았든 육체가 있는 한 육체에 대한 사랑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사랑은 주검 앞에서 절망해서는 안 된다, 주검이라는 육체는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청한다고요. 우리는 지금 정치적 애도보다는 절망 속에서 정치적 멜랑콜리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죽은 자와의 연대로서 온전한 정치적 애도를 해본 적이 있었나요.

 

나·들- 정치적 애도가 없었다고 하는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의 애도 물결은 온전한 정치적 애도에 속하지 않을까요.

김- 나도 그때 거리에 나갔습니다. 당시 노란색의 물결은 빨리 애도를 끝내고 망각으로 가기 위한 이전의 애도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또 한 번 망각의 영역으로 흩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와 현실은 엄중해서 결국 실천 영역에서 진위가 결정됩니다. 그 뒤 현실이 바뀌지 않았고, 과거 프랑스가 제2제정으로 회귀했듯이 우리 현실도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 현상도 겉보기엔 정치성을 띤 것 같지만, 정작 정치적 무력감의 표현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스스로 모여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시민혁명의 성공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공적 목적을 가진 모임에 대해 불신이 심한 것 같습니다.

 

나·들- 재귀적인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정치적 애도를 경험한다면 시민혁명과 같은 실천의 지평도 열릴 수 있겠군요.

김- 그래서 이번 참사에 대해 가능한 한 선정성과 거리를 두고 냉철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슬퍼하지 말자는 게 결코 아닙니다. 슬퍼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초가 돈키호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슬픔은 인간만이 갖고 있지만 너무 깊이 가면 동물이 되어버린다. 정신 차리라”고. 이번 참사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정치, 역사의 본질적인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이고, 나 역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예외적인 입지라는 자기 기만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야말로 예리하고 정치적인 담론이 형성돼야 합니다. 부디 “더는 한국에서 살기 싫다, 이민 가야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자체가 예외적인 입지를 욕망하는 거니까요.

 

나·들- 진정한 애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려면 무엇이 ‘유사 애도’인지부터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김- 애도를 공공화하려 하지 않고 사인화하는 것이지요. 나는 ‘자연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다들 ‘인재’라고 하지만, 권력은 앞으로의 처리 과정에서 사고 책임과 이후 임무를 면제받기 위해 ‘재수 없게 일어난 일’이라는 메시지를 교묘하게 유포하며 자연화를 시도할 것입니다. 분명 정치적 사건이고 사회적 부패가 곪아터져 생긴 산물인데 그걸 불행이나 사고라는 이름으로 처리하고, 살아남은 사람을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가면 참사는 자연재해처럼 되고 권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되지요. 그들은 “내가 일부러 침몰시켰느냐” 하며 자연화하면서 망각의 지평을 얻어낼 것이고, 우리는 망각의 지평 안에서 반복충동, 반복본능으로 다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나·들- 시스템과 관련해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담론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안전과 재난구조에 관한 매뉴얼을 둘러싼 논쟁은 비전문가로서는 진위를 판단하기도 어려운데, 거기에 시스템 운영자들의 무능력이나 일탈과 관련한 여러 음모론까지 유통되는 실정입니다. 우리의 삶이 시스템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김- 제도적 차원의 시스템이 돌아가고 안 돌아가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 삶이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앞에서 자유주의를 언급했는데, 역설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시스템이 너무 잘 돌아가기 때문에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요. 근대 민주주의 국가 시스템은 제법 잘 만들어졌지만, 이 시스템을 배반하는 것들, 이를테면 관료주의의 부패, 공공성의 사유화 등 탈시스템적인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뤄지다보니 그마저도 총체적인 시스템처럼 보이게 됐습니다. 더구나 일상의 시스템마저 여기에 결합해 삶의 법칙으로 작동하고 있고요. 베냐민의 표현대로 “국가이성이 보헤미안적”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규제를 푼다고 하고, 다시 어느 날 다른 제도가 공포되는 식입니다. 근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명목인 국민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구조 작업이 혼란을 겪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비합리성이 합리성이 되고 탈시스템이 시스템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감정이 그 회로에 갇히면서, 참사가 거듭돼도 반복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가 바로 시스템과 정치적 애도의 필요성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다시 정치적 애도, 애도의 정치학으로 돌아갔다. 죽은 자의 고통과 대면하고 죽은 자의 요청을 청취하는 것이 산 자에게 분명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줄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할은 애도보다는 애초 정치학의 본령이 아닐까. 다른 정치학도 아니고 왜 하필 미래가 아닌 과거와 대면하는 정치학이어야만 하는 걸까.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주입되는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가 미래주의입니다. ‘앞날은 잘될 거다’라고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장담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주의 탓에 현재는 미래를 위한 도구로서의 효용가치만 있을 뿐이고, 과거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애도조차 미래주의를 위한 것으로 여깁니다. 빠른 망각을 위한 애도지요. 애도의 정치학이란 미래라는 개념, 진보라는 개념을 죽은 자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연대를 통해 다시 사유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미래주의야말로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 정치가 모두 미래 정치이기 때문에 미래 또한 현재 권력이 자기 권력을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권리마저 박탈당한 셈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절망이고 멜랑콜리입니다.”

 

나·들- 시스템주의와 미래주의에도 어떤 접점이 있겠군요.

김- 국가체제라는 건 행정시스템이나 사회제도를 통해서 운영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이 시스템이 완벽하게 시스템적일수록 안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의 시스템은 우리가 말하는 미래로의 진보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좌초할 것입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모두 당하게 돼 있다는 뜻입니다. 경기도 안산이 어떤 곳입니까. 지리적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의 도시 아닙니까. 돈이 없는데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고 싶어 하니까 돈을 빌려서 보냈는데 죽었다고 합니다. 중산층 아이도 아닌 아이들, 힘없는 아이들 가운데서도 더욱 힘없는 아이들이 무참히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어서 우리에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까.

 

나·들- 분통 터진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정치적 애도는 그런 즉자적인 격분과는 사뭇 다른 것 아닌가요.

김- 오해입니다. 인간이 가진 감정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생긴 능력입니다. 화내는 것도 능력이고 경멸하는 것도 능력입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뿐 아니라 기쁨, 즐거움, 사랑 같은 긍정적 감정도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조차 이데올로기화돼 있고 회로화돼 있는 것 아닙니까. 제대로 분노하는 것, 제대로 경멸하는 것, 그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분노와 성찰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분노 없는 성찰이 무슨 성찰의 힘을 지닐 것이며, 성찰 없는 분노는 그냥 화풀이일 뿐입니다. 슬픔이 깊어지면 성찰로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성찰이 깊어지면 연민, 공동체의식으로 건너갈 수 있을 테고요. 결국 애도는 성찰과 연민이 다시 해후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진정한 분노

 

얼마 전 한 고등학생이 아고라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배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면 돼지처럼 등급이 매겨지고, 점수가 내려가면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른다. 우리도 죽어가고 있다.” 그는 배 안에 갇혀 죽은 또래들의 고통스러운 요청에 연대해 배 밖의 자기 현실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있다. 그 학생은 이제 산 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글 안영춘 편집장 jo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