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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공공성을 걷어찬 집단이 만든 ‘김영란법’

언론이 ‘번안’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마치 ‘언론인 관계법’처럼 읽힌다. 전체 법안 가운데 취사선택해 보도하는 내용부터가 주로 자신들에 관한 것인 데다, 이 법안에 목소리를 높이는 거의 유일한 집단 역시 그들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지금 자신의 얘기를 3인칭 화법으로 펼치고 있다. “오빠 믿지?”, “영란이 무서워요”처럼.

반면 이 법에 얽힌 이해관계가 언론인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공무원 집단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복지부동’은 그들의 유서 깊은 본성이어서? 그동안 일삼은 짓 때문에 마땅한 반대 명분이 없어서? 아니다. ‘표정관리’다. 법안의 국회 심의 과정에서 선출직(국회의원)이 ‘셀프구원’을 넘어 임명직도 빠져나갈 수 있는 ‘연대의 구멍’까지 함께 터준 덕분이다.

한겨레 3월4일치 ‘한겨레 그림판’. 장봉군

김영란법은 어느 면에서 내용(텍스트)보다 통과 과정과 통과 이후(콘텍스트)가 더 의미심장하다. 애초 원안을 만든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이 법을 ‘더치페이법’이라고 규정했다. 설령 그녀가 회식·접대문화 정도 바꾸려고 그 힘든 사역을 감당했는지 몰라도, 이 법은 우리 사회 전반의 현주소를 함축하고 있다. 법안 통과 과정과 이후는 그에 관한 은유다.

국회의원들이 법안 심사 과정에서 ‘직무관련성’이나 ‘가족’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킨 것은 너그럽게 보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 누가 눈에 빤히 보이는 제 무덤을 설계대로 파고 싶겠는가. 중요한 건 그들이 자신(공무원 집단)의 사익을 관철하려는 데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정이나 뻔뻔함 같은 개인윤리 문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선출직 공무원은 공적 신분의 상징적 존재다. 근대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에서 이들을 직업인으로 볼지, 이들에게 급여 성격의 대가를 지불할지는 심각한 쟁점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자신의 직업적 집단이해를 법률에 새겨넣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자신의 상징을 그렇게 제 발로 걷어차고도 당당할 수 있는 건 뻔뻔한 게 아니라 차라리 무지한 거다.

그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주해야 그들이 김영란법에 언론인을 끌어들인 이유도 비로소 설명할 수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속기록에는 누군가가 언론인을 포함하자고 제안하자 일사천리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나는 ‘기자들 밥 사고 술 사느라 어지간히 등골이 휘었나보다’며 낄낄대다가, 이내 그들의 일관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출직 공무원이 자신을 더는 공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으면 공공과 민간을 분별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입만 열면 스스로 ‘공적 가치를 수행하고 있다’고 떠드는 직업집단이 있으니, 바로 언론인이다. 민심은 언론인을 ‘기레기’로 치부하는데, 무구한 국회의원들은 언론인의 ‘자가발전’을 믿는다.

직업적 자부심이 넘치는 언론인들은 김영란법이 ‘비판 언론 재갈 물리기’와 ‘표현의 자유 위축’을 가져올 거라고 주장한다. 공짜 양주 안 얻어먹고 공짜 골프 안 치면 그럴 일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언론인들은 목소리만 높였지 정작 이 법을 헌법재판소로 가져간 건 법조인들이다. 대한변협이 민간인인 언론인을 공무원 취급해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나도 김영란법이 위헌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전혀 다르다. 국회 통과 과정에서 이 법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정면 위배했다. 공화국의 기본 전제인 ‘공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집단이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 김영란법뿐이겠는가. 시장주의만 횡행하는 대한민국 전체가 위헌 아닐까. ‘국립’ 한국방송통신대 구성원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