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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세월호가 ‘주폭’을 만났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리운전 기사를 폭행한 일은 형사상으로는 흔해빠진 주폭(酒暴) 사건일 뿐이지만,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경찰 수사의 초점은 당연히 물리적인 행위에 맞춰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중시해야 할 지점은 그 실재와 상징 사이의 머나먼 간극이다. 국회의원을 앞세운 유가족의 ‘권력질’로 상징화된 사건은 여태까지의 역학구도를 일거에 뒤집어놓고 말았다.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다

이 사건의 파괴력은 ‘쾌락의 평등주의’에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 한국 사회의 평등주의는 유별나다. 중간계급의 정체성을 내면화한 고만고만한 주체들이 쾌락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견제구를 던지는 역설적인 경쟁의식이다. 네가 하는 것은 나도 해야 하고, 내가 못하는 것은 너도 해서는 안 된다. “유가족이 무슨 벼슬이냐”라는 언설도 그런 맥락과 닿아 있다. 유가족들은 한국 사회의 그 상징적인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이런 속성을 발빠르게 활용하고 있는 건 특별법에 한사코 반대해온 쪽이다. 저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참주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가호위나 하는 불한당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이라는 거다. 반면 유가족들을 지지해온 쪽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배신감까지 토로한다. 선택지는 침묵뿐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번 사건을 권력질로 이해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다. 유가족들에게 덧씌워진 또 다른 굴레를 규명해야만 사건을 온전히 복기할 수 있다. 특별법을 반대해온 쪽에서 참사의 탈정치화를 노려 만든 ‘순수 유가족’이라는 상상적 도덕론 말이다. 순수 유가족론은 가족의 죽음을 다만 슬퍼해야지 진실을 파헤쳐 책임을 묻는 건 애도의 순결성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유가족들의 ‘정치질’이이번 사건을 통해 권력질로 발현했다는 논리 회로는 그렇게 완성된다.

유가족들을 지지하는 쪽은 어땠을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낳는 법은 아니다. 참사 100일째 되던 날 목격한 장면이다. 거리 행진을 이끌던 무대차가 청계3가에서 멈춰섰다. 참가자들의 발언이 이어지자, 일단의 무리가 “왜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하느냐”며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누군가가 “지금 발언하는 분은 유가족”이라고 일러주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럼 계속해야죠.”

저들의 참주선동, 이들의 선의적 편견

유가족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겠지만, 그 바탕에는 유가족들을 (도덕적) 무오류의 주체로 간주하는 무의식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모든 약자가 도덕적 주체는 아니다. 외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건 약자와 강자의 위치가 상대적이고 가역적이라는 것이다. 피해 사실이 곧 도덕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피해를 입고도 다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가족들은 지금 쾌락의 평등주의와 상상적 도덕론의 이중 굴레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너 국정원이지?” 유가족들이 대리운전 기사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가족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헌법상의 시민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광주 트라우마 센터의 강용주 원장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희생자들에겐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상황이 일상적이라고 한다(<미디어스> 9월19일). 실재와 상징(상상)을 엄격히 구분하고 보면, 이번 사건이 증명한 건 특별검사만으로는 유가족들이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