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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글

공감하는 만큼 보인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는 표어가 위세를 떨치던 때가 있었다.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에 밀린 지금이야 외진 국도 휴게소 남자화장실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한때는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를 평정하며 ‘명문’이라는 격찬까지 듣는 귀한 몸이셨다. 효과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정도 세대 이전 남성이라면 저 표어 앞에서 저도 모르게 전립선이 움찔해지면서 가랑이 벌린 두 발을 엉거주춤 소변기 앞으로 당기게 하는 조건반사를 한 번 이상 경험했을 테니까.

남성들에게 눈물은 남성성을 배반하는 이데올로기로 유구히 전승되고 내면화되어왔다. 울어야 할 때,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 안구건조증이 아니라 공감능력 부재다. 눈물은 자기연민이나 타자에 대한 공감의 생리적 발현이다. 저 표어가 지금까지 모두 몇 방울의 액체를 소변기에 정조준하도록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눈물을 잘 흘리는 남성이 오히려 이타적으로 소변을 볼 것은 틀림없다. 가족을 배려해 앉아서 소변보는 남성을 떠올려보라. 표어는 바뀌어야 한다. ‘부디 눈물을 흘리십시오.’

기자 세계와 남자화장실은 다르지 않다

내가 20년 남짓 겪은 기자 세계는 남자화장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취재할 때의 일이다. 50년 만에 만난 혈육이 다시 헤어지는 자리였다. 오열하는 그들을 보니 하릴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맞은편에 서있던 동료기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울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히 등을 돌렸다. 일종의 직업정신이라고 해도 좋을까. 훈육된 남성성이 저널리즘의 객관성 규범과 착종된, 기자는 취재현장에서 공감 돋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따르려고 애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정신은커녕 차라리 직업병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기레기’는 일탈한 기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커밍아웃한 기자들이다. 내 경험에 비춰 그들은 자신을 언제 어디서나 예외적 입지에 놓는 훈련을 거듭하다 시나브로 공감능력을 잃고, 그 참극의 현장조차 물신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온갖 욕을 얻어먹고 대국민 사과문까지 발표했어도, 정작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를 거라고 의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껏 ‘보도 참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다행히 내 의심이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얼마 전 같은 신문사의 한 후배 기자는 세월호 유가족의 십자가 도보 순례를 한 달 남짓 동행 취재했다. 다른 후배는 유가족 단식 농성장에서 이틀 동안 단식을 함께 하며 취재했다. 그 후배는 페이스북에 “완벽한 저널리즘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라고 글을 올렸다. 완벽한 저널리즘 원칙이 뭐기에? 나는 오히려 그 후배들의 ‘눈물겨운’ 취재에서 배웠다. 궁극의 저널리즘 원칙은 ‘공감하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을.

진도/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교황은 신중하게 용변을 보시겠지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5일 동안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그는 세월호 유가족한테서 받은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미사를 집전했다. 반나절쯤 지나 누군가 “중립을 지키려면 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그가 용변을 볼 때도 매우 신중할 거라고 멋대로 상상하게 되었다.

* <한국방송대학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