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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꽂힌 타인의 글

‘마주 보기‘를 넘어 ’함께 보기‘ - ’공감‘

※ 살다 보니 이런 글에 내가 등장하는 일도 겪게 된다. 여기에 걸어놓고 자주 스스로를 살피고자 한다. 외우 강남구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5월 15일.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반을 넘고 있었다. 새벽녘에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와 검정 정장으로 옷을 갈아 입고 운전을 하는데, 눈물이 가득 앞을 가렸다. 차 안에 갇힌 내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그 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다. 7시간 전 사별한 아내를 향해 “이게 뭐냐” 소리를 뒤늦게 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새벽 병원에서 통곡하시는 어른들 앞에서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잠든 장례식장을 향하는 길에선 두 가지 상념이 교차하는데, 하나는 외면하고 싶어 도망가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가야 한다는 나의 의지이다. 불안정한 심리만큼 차도 이리 그리고 저리 흔들렸다.

전화기를 꺼내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선배”라 부르고 “아내와 오늘 사별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잇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자 그 상대방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어렵게 “그랬구나”라고 대답해 주었다. 많은 동료들이 “힘을 내라”거나 “흔들리지 마라” “더 강해져라”라는 조언을 했지만, 그 선배 만큼은 네 상황에 “그렇구나”라며 공감해 주었다. 대다수 조언에 ‘힘을 내지 못해 죄송합니다’와 ‘흔들리고 있습니다’와 ‘약한 모습 보여 죄송합니다’란 독백을 해야 했지만, “그렇구나”란 말 속엔 ‘네 그렇습니다’란 독백만 하면 그만이었다. 배려는 가끔 일방향으로 흐르지만, 공감은 쌍향향으로 오가고, 그래서 따뜻하다.

공적인 업무 과정을 통해 사적인 관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은데, 그 선배와 보낸 시간은 사적인 고민까지 허락해 주었다. 기사 방향을 잡는 데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취재 방법에 대해서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보니 곧잘 술자리에서 함께 있었다. 조언을 구했고, 조언을 받았다. 처음에는 취재 분야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를 찾았다. 내가 선배를 찾았던 첫 번째 배경이기도 하지만, 선배는 일단 취재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 선배와 어느덧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같은 위치에 서고자 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지는 못했지만.

먼저 듣기 전에 말하는 법이 없었다. 지시보다는 설득하려 했고, 지시를 했을 때는 차분한 설명이 뒤를 따랐다. 언론사에서 선후배 간 관계는 자주 일방적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항상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에, 단어 하나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예민했다. 공채 1기가 입사했을 때 일인데, 당시 수습기자들을 상대로 ‘애들’이란 표현을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던 일은 부끄럽지만 기분 좋은 기억이다. “이름을 불러야지 왜 ‘애’란 표현을 쓰나?”란 한 마디. 자신의 철학은 그리고 세계관은 언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이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언론계 선후배 관계 간 일방적 권력 관계는 ‘전통’이나 ‘문화’란 수식어로가 붙어 면죄부를 받는다. 특히 인터넷 뉴스가 관심을 받으면서 일방적인 대화는 전 언론계로 더 깊숙이 퍼졌다. 관계는 시간을 따지지 않는 법인데, 그래서 과정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효율과 속도 때문에 기자의 입은 짧게 문을 열고 닫는다. 대화도 효율성 안에 갇힌다. 대화없이 데스킹 보기, 지시하고 전화끊기, 기분대로 회식 정하기, 기사방향만 전달하기 등, 등, 등. 결국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라며 꾸짖지만, 그 언행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감정을 쉽게 분출하기 위한 명분일 때가 많다.

신영복 선생의 말로 기억하는데 “깊은 인연은 마주보는 것보다 같은 방향을 볼 때 가능하다”고 했다. 마주보기 위해선 각자의 위치에서 일정 정도 거리 두기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바라보는 자는 자신이 가진 권력의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마주보기‘는 분명 나 중심적이기 쉽다. 웃으며 후배에게 전달하는 말 한마디는 미소를 머금은 명령일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한 동료에게 “인터넷에 이 기사를 톱으로, 그리고 다음 이 걸로 올려”라며 짧게 말을 열고 닫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정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인가 보다.

장례 첫 날 밤, 그 선배는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두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눈물을 흘렸다. ‘남자라면‘ 이나 ’선배라면‘ 등의 한국 사회가 만든 마초적인 조건에 대한 계산 없이, 나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울었다. 조문을 해 준 회사 동료들과 시경 캡과 바이스 등 많은 분들이 기억에 남지만, 그래도 함께 눈물을 흘려준 선배의 얼굴은 아내와 사별한 지 한 달여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좋은 선배로 남기 위해, 첫 발걸음은 기자로서 취재 실력이 시작이다. 그리고 거대 권력 앞에서 물러섬이 없으면서도 약자를 끌어안는 양식이 선배로 성장하기 위한 두 번째 숙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후배와 공감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배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그런 선배가 되기를 꿈꾼다.

이 지면을 빌어 좋은 선배상을 보여 준 한겨레 안영춘 선배께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